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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행사 포스터를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

자유게시판2013. 11. 4. 23:47

소위 진보-개혁 세력이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 하나는, 그들의 언어가 너무 어렵다는 데 있다.

민주화 이전 운동권세력은 현란한 사회과학 용어로 그 어려움을 자랑했다. PD,NL,파쇼,약한 고리 이론...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한국 내 진보-개혁 세력의 현란한 이론도 힘없이 바스러졌다.

민주화 이후 20여년간 화려하고 어려운 언어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현란한 언어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 같다.
요즘 진보-개혁 세력은 너무(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너무’) 영어에 빠져있다.
툭하면 소셜이고, 걸핏하면 플러스, 심심하면 크리에이티브다.

나는 언어민족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어든 영어든, 화자와 청자가 원활히 소통할 수 있다면 매개 언어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

그런데 위에 나열한 것 같은 영단어 사용은 청자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일상적인 한국어 내에서, 소셜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은 그 의미가 여전히 모호하다.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편안한 언어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진보-개혁 진영은 그 소규모 세력을 확장하는 데 계속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 마치 80년대 이전까지 운동권이 자기들만의 언어로 대중과 소통하는 데 실패했던 것처럼 말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변화’를 이뤄내고싶다면, 대중 공감이 필수다. 4.19는 김주열 시신에서 촉발된 국민적 감정이 도화선이었고, 87년 6월은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팔할이었으며, 광우병 파동은 개인이 건강 걱정과 국가의 한심한 협상력에 대한 답답함이 원동력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외부 사건에 기대지 말고, 이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편안한 언어를 개발했으면 좋겠다. 영단어 먼저 써놓고 한국어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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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블로그 액션 데이

자유게시판2013. 10. 16. 23:54


Zen Pencils가 '2013 블로그 액션 데이'를 맞아 배포한 이미지. (http://zenpencils.com/comic/134-the-universal-declaration-of-human-rights/)



오늘(2013.10.16)이 '블로그 액션 데이(Blog Action Day)'라는 이메일을 이제서야 확인했다.


미리 알았다면 나도 뭘 좀 써봤을텐데 아쉽다. 밤 11시 53분이기 때문에 곧 자야한다. 내일아침 갈 곳이 있기때문에...


암튼


2013년 블로그 액션 데이의 주제는 인권(HUMAN RIGHTS)다.



고종석 글쓰기 과제_'가을'주제 1600자 자유 글쓰기_첨삭 반영

자유게시판2013. 10. 15. 13:10

* (2013년 10월31일 작성) 4군데를 수정 첨삭받았습니다. 

수정 부분은 밑줄을 그었으며, 수정 전 원본은 이 글 하단으로 내렸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그 세계관을 공유했기 때문인지... 마지막에 '아주 좋습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뿌듯합니다.


* (2013년 10월15일 작성)현재 수강중인 고종석 선생님의 글쓰기 수업 첫 번째 공통과제입니다.

3주 혹은 4주 후에 첨삭받아 돌려받을 예정이며, 첨삭 결과도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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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삭 후

대한민국 애국가 3절 가사는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로 시작한다애국가 덕분에 나는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한반도 가을 하늘이 정말 높은’ 하늘인 줄 알았다더하여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름다운 이 나라에서 길이 보전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삼월나는 인천을 떠나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남반구 국가 호주는 3월에 가을을 맞이한다멜버른에 처음 도착한 날 도심 풍경과 진정으로 높은’ 가을 하늘은 지금도 눈에 선명하다풍성한 구름도 맘에 쏙 들었다멜버른에선 작은 직사각형 도심만 벗어나면 고층 빌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디서나 지평선이 보인다넓은 하늘과 그 위를 멋지게 부유하는 구름은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됐다.

멜버른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서울의 가을 하늘이었다남반구에서 정말 아름다운 하늘로 눈 호강을 했던지라고층빌딩에 가로막힌 서울 하늘은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도심을 벗어나면 이번엔 아파트가 하늘을 가린다지평선은 꿈도 못 꾼다하늘을 막아선 고층건물과 아파트를 볼 때마다지평선과 넓은 하늘을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내가 살아갈 곳은 한국일 것이다정말 큰 이변이 없다면 말이다어쩐지 갇힌 기분이기는 하지만 적응할 수밖에 없다.

탈출 기회를 한 번 잡기는 했다올 상반기 교환학생 신분으로 덴마크 오덴세에 다녀왔다다섯 달 지내는 동안높은 하늘을 원 없이 바라봤다비록 앞의 석 달간 회색 하늘빛 아래 유사 우울증에 시달리긴 했지만뒤의 두 달 내내 나는 눈부시게 높은 하늘과 푸근한 구름을 감상했다지평선을 볼 수 있는 평지와 높은 하늘은적어도 나에게한반도 화려강산보다 아름다웠다.

짧은 탈출은 끝났고스물여섯 먹은 나는 8월부터 작은 언론사 인턴기자로 일하고 있다사무실이 17이어서 창문 정면을 바라보면 나름 넓은 하늘이 보인다하지만 시선을 살짝 돌리면 맞은편 건물이 하늘을 가로막는다. 10월 중순 가을로 접어들자 해질 무렵 하늘빛은 세상 그 어떤 보석 빛깔보다 아름답다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서울 건물은 너무 높다내 심미안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곳에 살아야 하는 신세가 애석하기는 하나그렇다고 해서 연고도 직장도 없는 국외로 떠나기란 더 어렵다내 또래 대다수가 그렇듯 나도 현실이라는 환경에 순응하고 있다.

나는 곧 인턴 근무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끝낸 후 진짜 사회인이 될 것이다내 앞날이 어떻게 풀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부디 너무 씁쓸하게 전개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소중한 가족절친한 친구사랑하는 애인(10년 후라면 '아내')에 더해 일용할 양식만 주어진다면 나는 그럭저럭 한국 아름다움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멜버른에서 일하며 살 때도오덴세에서 공부하며 살 때도 한국을 그리워하는 순간은 꼭 찾아오곤 했다어쩌면 내가 어린 마음씨를 아직도 버리지 못해 내 곁을 둘러싼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작은 다짐을 해본다매년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으로 내 마음을 달래보겠노라고매년 가을이면빌딩 숲에 둘러싸여있을지언정서울 하늘을 즐거이 만끽하겠노라고그리고 더는 외국 살이를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다만 매년 가을 진정으로 높디높은 그 동네 하늘을 그리워하는 건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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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삭 전

대한민국 애국가 3절 가사는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로 시작한다. 애국가 덕분에 나는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한반도 가을 하늘이 정말 높은하늘인 줄 알았다. 더하여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름다운 이 나라에서 길이 보전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삼월, 나는 인천을 떠나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남반구 국가 호주는 3월에 가을을 맞이한다. 멜버른에 처음 도착한 날 도심 풍경과 진정으로 높은가을 하늘은 지금도 눈에 선명하다. 풍성한 구름도 맘에 쏙 들었다. 멜버른에선 작은 직사각형 도심만 벗어나면 고층 빌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디서나 지평선이 보인다. 넓은 하늘과 그 위를 멋지게 부유하는 구름은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됐다.

멜버른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서울의 가을 하늘이었다. 남반구에서 정말 아름다운 하늘로 눈 호강을 했던지라, 고층빌딩에 가로막힌 서울 하늘은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도심을 벗어나면 이번엔 아파트가 하늘을 가린다. 지평선은 꿈도 못 꾼다. 하늘을 막아선 고층건물과 아파트를 볼 때마다, 지평선과 넓은 하늘을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살아갈 곳은 한국일 것이다. 정말 큰 이변이 없다면 말이다. 어쩐지 갇힌 기분이기는 하지만 적응할 수밖에 없다.

탈출 기회를 한 번 잡기는 했다. 올 상반기 교환학생 신분으로 덴마크 오덴세에 다녀왔다. 다섯 달 지내는 동안, 높은 하늘을 원 없이 바라봤다. 비록 앞의 석 달간 회색 하늘빛 아래 유사 우울증에 시달리긴 했지만, 뒤의 두 달 내내 나는 눈부시게 높은 하늘과 푸근한 구름을 감상했다. 지평선을 볼 수 있는 평지와 높은 하늘은, 적어도 나에게, 한반도 화려강산보다 아름다웠다.

짧은 탈출은 끝났고, 스물여섯 먹은 나는 8월부터 작은 언론사 인턴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무실이 17층인지라 창문 정면을 바라보면 나름 넓은 하늘이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살짝 돌리면 맞은편 건물이 하늘을 가로막는다. 10월 중순 가을로 접어들자 해질 무렵 하늘빛은 세상 그 어떤 보석 빛깔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서울 건물은 너무 높다. 내 심미안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곳에 살아야 하는 신세가 애석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연고도 직장도 없는 국외로 떠나기란 더 어렵다. 내 또래 대다수가 그렇듯 나도 현실이라는 이름에 순응하고 있다.

나는 곧 인턴 근무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끝낸 후 진짜 사회인이 될 것이다. 내 앞날이 어떻게 풀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부디 너무 씁쓸하게 전개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소중한 가족, 절친한 친구, 사랑하는 애인(10년 후라면 '아내')에 더해 일용할 양식만 주어진다면 나는 그럭저럭 한국 아름다움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멜버른에서 일하며 살 때도, 오덴세에서 공부하며 살 때도 한국을 그리워하는 순간은 꼭 찾아오곤 했다. 어쩌면 내가 어린 마음씨를 아직도 버리지 못해 내 곁을 둘러싼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다짐을 해본다. 매년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으로 내 마음을 달래보겠노라고. 매년 가을이면, 빌딩 숲에 둘러싸여있을지언정, 서울 하늘을 즐거이 만끽하겠노라고. 그리고 더는 외국 살이를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다만 매년 가을 진정으로 높디높은 그 동네 하늘을 그리워하는 건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듯하다.


2013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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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맞이 썰 1,2

자유게시판2013. 10. 9. 17:08

*둘 다 페이스북에 작성했던 글인데, 평소 내 생각이 잘 드러난 글이기 때문에 페북 피드에 묻히게 방치하기보단 블로그에 옮겨두어야겠다 생각해 여기 복사함. 원문을 그대로 복사했기 때문에 평소 내가 글에서 보이던 어투와는 차이가 있다.






한글날을 맞이해 온 언론이 들썩들썩..

딴지걸고싶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애들이 말을 줄이든 말든 신경좀 꺼.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 현상. 세대 간 언어차이는 단군 이래 항상 존재했던 현상. 반대로 생각좀 하면 어디가 덧나나? 
'애들이 쓰는 말을 어른이 못알아듣는다'만 때리지만, 사실 어른들이 쓰는 말도 애들은 못알아듣습니다. 이 글 보는 분들 중에 '후앙'이 뭔지 아는 사람? 

2. 한글이랑 한국어좀 구분해서 썼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한글은 맞지만, 한국어는 그냥 언어들 가운데 하나일 뿐. 다만 한국어는 언어 자체로 봤을 때 좀 특이한 구석이 있음-- 도통 뿌리를 찾기가 힘듦: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게 일단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음. 물론 그 반론의 성격은 '알타이 어족'으로 보기 힘들다'는 정도지, 한국어의 뿌리를 다른 어딘가에서 찾아오지느 못하고 있음

3. 외래어는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그 의미가 나타내는 바를 현실 속에서 '우리화'하려고 노력해야할 대상이지 배척해야할 '찌꺼기' 가 아니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새끼 재수없다'는 느낌을 들게 하거나 'ㅄ 뭔소리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에 무한정 늘어나기가 힘들다고 생각함.

4. 한국어/한글 지키기는 공교육 국어 교육이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으니 한글단체 관계자분들은 쓸데없이 방송 나오거나 캠페인 벌이지 말고 교육부를 조지세요.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국어 시, 소설, 산문을 읽고 자란 학생은, 말하지 말라고 해도 매끄럽고 명확한 한국어 문장을 말하고 쓸 겁니다. 

5. 그리고 글쓰기 교육좀.... 한 편의 글에 주어-술어 불일치는 기본이며 각종 비문이 넘쳐나는 경우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다. 학생들한테 글을 쓰게 시켜봤어야지... 영어랑 한국어를 비교하면 난 그래도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어를 더 좋아하지만, 적어도 글쓰기 문제에 관하자면 우리나라는 미국/영국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한글날 맞이 썰 2탄. 단어가 단어니만큼 어조는 아주 경건 경건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41477 를 읽고...)


인터넷상은 말할 것도 없이, 201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섹스'라는 단어는 이미 자리를 잡을 대로 잡은 '한국어 단어'다.

비록 유래가 서양일지언정, '섹스'는 서구화가 이뤄지는 동안 꾸준히 한국어 사용자들의 어휘 목록에 자리잡았으며, '성행위', '성관계'보다 훨씬 친숙한 일상어가 됐다.

그리고 인터넷의 확산과 자유분방한 사회 풍조에 따라 '섹스'는 여러 단어와 결합하며 한국어 사용자들의 언어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것들이 음지에 한정돼있고, 대부분 음담패설과 관련돼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섹스'의 형용사형 단어 '섹시'는 이미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아주 일상적인 한국어다. '야하다'는 말에 담긴 천박함과 '성적 매력이 있다'는 말의 노골적임을 피할 수 있는 단어다. '섹시'를 한국어 어휘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제거했을 때 우리 언어 생활은 불편해지면 불편해지지, 결코 편해지지은 않을 것이다.

또한 '섹스'는 '드립'과 결합해 '섹드립'이라는 절묘한 조어까지 낳았다. 신동엽이 "어머님이 걱정하시는 그건 낮에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거나, 사이먼디가 "다이어트 할 뻔 했는데"라고 말하는 모습을 두고 우리는, 그리고 각종 매체는, 아무렇지 않게 '섹드립'을 내뱉었다 칭한다.

'야한 농담'과 '음담패설'이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섹드립'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순진무구한 영혼들이나, 외국어 사용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일부 한국어 순혈주의자들은 '섹드립'이라는 단어가 2013년 일상 한국어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사실이 불편하겠지만.

정리하자면, '섹스'는 자연스러운 한국어 단어다. 그것도 다른 단어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한국어 단어.

상황이 이럴진대, '섹스'를 '니디티'로 바꾸자는 노력은 헛수고에 수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특정 단어와 그에 얽힌 행위가 금기시되는 현상은 현실 세계의 노력으로 개혁해야지, S-E-X에 해당하는 한글 자판 ㄴ-ㄷ-ㅌ를 이용한 말장난으로 개혁할 수는 없다.

마치 '왕따'를 대신할 말을 만든다고 해서 왕따 현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처럼, 혹은 '병신'을 대신해 '장애인'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한국 장애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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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슬프다.

자유게시판2013. 5. 19. 07:52

꿈이라는 말, 소리내어 말해보면 정말 꿈 같다. 한 음절의 순 우리말 단어들이 대개 그렇듯, 꿈이라는 말도 너무나 즉각적으로 의미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소리와 의미는 다시금 꿈결같이 사그라든다.



나는 1988년에 태어난 한국 나이 26살의 남자. 나의 꿈은 대체 무엇인지, 그 해답이 너무나 절실하다.




어릴적 깊게 관심 가지던 분야가 있었다. 바로 컴퓨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친구들 컴퓨터가 고장나면 내가 그  집에 찾아가 해결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학교 입학 선물도 CD-RW를 사달라고 했었구나... 당시엔 보통의 중고등학생들에게 CD 레코딩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아무튼, 느려터진 8배속 CD-RW로 나는 친구들에게 음악 CD, 게임 CD를 만들어 팔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완전 불법 장사치였구나. 물론 그때나 가능했던 장사질이라는 점에서 추억이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엔 학교 교무실과 교실 컴퓨터를 수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컴퓨터 과목 선생님이 짜장면 한 그릇 시켜주고 하루 종일 같이 일하게 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부려먹을 계획이면 맛있는 것 좀 사 주지 짜장면 한 그릇이 뭔가 싶다. 그래도 그 날은 뿌듯하기만 했다. 내 손으로 전교 컴퓨터의 절반을 다 손봤으니 말이다. 아, 요즘은 선생님들한테 노트북이 지급되니 이것도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컴퓨터 하드웨어를 끼고 사는 것이 좋았으니, 고등학교에 가면서는 당연히 이과생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에 가 보니... 수학이 너무나 어려웠다. 입시만을 강요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환경에서, 수학을 못 하는 학생이 이과에 가겠다는 만용을 부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문과를 선택했다. 문과를 선택하면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 말하는 대로, 그리고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흘깃 본 적 있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다. 쉽게 말해서 취업을 잘 하고 싶었다. 문과에 가기로 한 이 결정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다. 사실 좋게 말해 변곡점이고, 솔직히 말해 정말 후회하는 부분이다.



아무튼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기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로 수험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목표하는 만큼 다 이루어내는 수험생이 얼마나 있으랴. 나도 목표했던 바에 살짝 못미치는 점수를 얻었다. 원서를 쓰는 기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성대' 아래로는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점수에 맞추어' 성균관대 인문과학계열에 원서를 넣고 합격했다. 원서를 넣을 때도, 그리고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도, 내 생각은 한결같았다.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해야지.' 아참 오해하실까봐 한 마디 붙이자면, 고대에 대한 미련같은 건 전혀 없다. 나는 우리 학교를 정말 좋아한다 :)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 보았다. 학부 입학생으로서, 2학년에 올라갈 전공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출시된 '내일로 티켓'을 사들고 7일간 우리나라 여행을 하며 고민을 계속했다. 결론은 영문학과. 이유는 쉬웠다. 취업에 가장 유리한 학과였기 때문이었다. 영문학과 진입에 성공했다. 이때까지도 그저 평범하게 공부좀 하다가,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해서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에, 그 해 학생회 대표를 하기도 했다. (영문과 계십니까? ^^.... )




그런데... 인생사 참 아이러니의 전시장이다. 영문과에서 만난 어떤 선배 덕분에 책 맛을 알아버렸다. 사실 처음으로 책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의 일이지만, 내 삶 가까운 곳에서 '책 읽는 맛과 멋'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학생회 일로 지쳐있었기에 학교 공부는 손을 놓았었지만, 틈틈이 '지적 허영'을 채우는 독서는 계속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명박 정부의 임기 첫 해였다. 광우병 파동이 터졌고, 사회 문제에 눈을 떴다. 내가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갖고 있다고 확실히 알게 된 것도 책과 함께 생각을 깊게 했던 덕분이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습관성 어때 탈골 때문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군복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런저런 책을 더 많이 읽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취업에 대한 생각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위대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정서가 뜨거웠고, 국민참여당이 발족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방향에 내 인생을 맡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꿈을 밀고 나가기는 너무 두려웠다. 대학 신입생 시절 '전공진입 고민'을 하겠다며 떠났던 내일로 여행처럼, 이번에는 '인생 진로의 고민'을 하겠다며 해외로 발을 돌렸다. 호주에서 도시 노동자로 6개월, 유럽에서 배낭 여행자로 2개월을 보낸 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해답이 나왔다. 정치인이, 아니면 시민 운동가라도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 번 애써보자고 결심했다. 




일단 접근 가능한 일부터 시작해보라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한 시민단체의 대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작은 규모였지만 나름의 강연회도 주최해보고, 역시 작은 규모였지만 사람들을 모아서 '토크 파티'라는 행사도 진행해보았다. 4월 11일 총선을 맞이하며 투표 독려 캠페인도 참 열심히 준비했었다. 여담으로, 그때 NHK에서 '한국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주제로 취재를 왔었는데, 내가 프레젠테이션 하는 영상이 1초정도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못 타본 공중파를 일본에서 타게 되다니... 1초였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뿌듯했다.



총선이 끝난 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가 터져나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통합진보당 지지 철회'만을 외쳤다. 허나 시간이 갈 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나의 정치적 롤모델이었던 유시민의 얼굴이었다. 그의 안색은 피로감과 비루함으로 물들어갔다. 사태를 지켜보단 와중,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이 너무나 많겠구나.' 당시 총선에서 낙선한 홍준표 현 경남도지사는 공직생활을 마감한다는 트위터 멘션에 '비아냥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많은 오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 자신으로 인해 빚어질 사건, 또한 그 사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펼쳐지리라는 예상. 나는 과연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견디고, 마음 속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냉정히 판단해본 결과, 나는 그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날로 직업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은 사라졌다. 시민으로서, 공공선과 연대를 고민하는 시민으로서 우리 사회과 공동체에 관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가장 긴 시간 고민했던 꿈이 사라지자, 당장 내 인생의 꿈이 다시 필요해졌다.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꿈'이 필요했다. 단순히 또 하나의 취업 준비생이 되기는 너무나 싫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일까. 마침 청강하던 영어학 수업에서 길을 찾았다. 이전까지도 영어나 언어 일반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는데, 그 수업에서 인생의 목표가 될 만한 내용을 발견했다. 학자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생 항로에 또다른 변곡점이 생겼다. 복수전공을 신청할 마지막 기회를 내 손으로 포기하며, 영어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학생으로서 하는 외국 생활이 어떠한지를 체험해보고 싶어서 4학년 1학기라는 시점에 맞추어 교환학생을 지원해 선발되었다. 




학자로서의 내 가능성을 평가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이 땅에 온 지도 벌써 세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우리 학교 영문학과 수업에 비하면 정말 터무니없이 '많은' 분량의 읽을거리 앞에서 매일매일 좌절하고 있다. 요즘은 에세이를 써야 하는 시험기간이다. 요 며칠간, 읽어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영어 문장들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연스럽게 또다시 내 꿈에 대한 회의감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과연 나는 학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일까?




너무 슬프다. 인생이라는 게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아이러니의 전시장이라지만, 뭐가 되고 싶은지 하나 명확하게 찾지 못하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그 시절, 꿈꾸던 삶을 쫓아 이과를 갔더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방황하지 않고 명확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밤이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맨,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 학자... 모두 나에게 조금씩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2학년 문과로 진학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진로 고민의 자유.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는 나에게 선고(宣告)된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이 자유를 모르는, 내가 하고 싶고 꿈꾸는 일만 바라보는 컴퓨터 공학도였다면... 적어도 진로 때문에 이렇게까지 좌절하며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하나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 시절 내 삶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죄가 있나보다. 10대 중반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죄로 나는 스물 여섯이 되도록 대체 내가 무얼 원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단단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인터넷 글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글이고, 뚜렷한 주장 하나 없는 글이라 어느 누가 잘 읽어줄지도 걱정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나와 같은 처지라면... 방황하는 20대가 여기 또 한 명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2013년 5월 19일 밤 12시 5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