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자본주의를 탐구하다 문득 나를 돌아보다.

독서기록2013. 2. 21. 03:48

2010년 8월 22일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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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닌 서평을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항상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압박감 때문에 천천히 서평을 써 볼 여유 있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때문에 이렇게 서평을 써보려고 한다. 

자본주의. 정확히 어디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라났으며,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이 괴물. 누구나 이 괴물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 상처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들과 반대로, (속물적 근성에서 오는)우월감이나 우쭐함을 느껴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당장 나를 돌아보더라도, 어린 시절 돈과 관련된 안타까운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네 살 아래 여동생의 물건을 사러 문방구에 간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생의 선물을 사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당시 나는 아주 큰 박스에 담긴 장난감을 갖고 싶었고, 엄마는 그런 나의 손짓을 매우 미안해하고 또 난처해하는 표정과 함께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나의 내면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 잡았을까?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은 부모님 명의로 된 아파트에 네 식구 가족이 잘 살고 있기에 그 어려웠던 시절은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훨씬 전에,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내가 세 살 꼬맹이였을 때 옆집 아주머니께서 과자라도 사먹으라고 천 원짜리를 주신 적이 있는데, 세 살의 나는 그 천원을 ‘버렸다.’  

손 안에 들어온 ‘돈을 버린’ 나의 내면과 엄마가 나에게 장난감을 사주시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집에 돈이 많지 않아서’라는 점을 알고 있던 나의 내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돈을 버린 나에게는 화폐, 혹은 돈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였지만, 돈이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나에게 돈이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이 이럴진대,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기억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을까?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상처받으며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장에서 이상과 짐멜을 통해 돈이 어떻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지부터 시작하는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20년대 모던보이 이상의 적나라한 내면의 실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솔직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이 드러났는데 그 드러난 부분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리고 그 불쌍한 부분이 너무나도 나와 같아서 처음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날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쫓던 ‘모던함’은 결국 ‘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보다. 돈이 왜 없냐면서.(65쪽)

책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3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용돈은 한 달 3만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돈이 매달3만원이긴 했지만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고, 또 내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은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방구의 기억 때문인지, 난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요구는 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들 중에서도 무리한 요구가 있었기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한 달 3만원으로 지내던 나였는데, 대학교에 가보니 한 달 3만원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던 나는 입학 전부터 친척 어른들에게서 받은 상당한 용돈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부모님이 난생 처음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나에게 한 학기동안 잘 써보라고 통장에 넣어주셨다. 그런데 ‘돈 쓰는 맛’을 난생 처음 알게 된 나에겐 지출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대략 120만원을 단 두 달 만에 다 써버렸다. 기억에 남는 지출도 없다. 그저 놀러 다니고, 밥 먹고, 술 마시는 데만 그렇게 돈이 새나갔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 속 허무함은 커져만 갔고, 결국 잔고가 만 원 대로 내려앉는 순간 마음 속 허무함은 육체적 무기력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날개』의 주인공(=이상)이 돈의 가치를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느끼는 ‘돈이 없다’라는 느낌을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느꼈던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들은 결코 지금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공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여러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 

두 번째 장의 보들레르와 벤야민 부분은 패션의 에로티시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141쪽)

우리는 왜 계속해서 옷을 살까? 분명 옷장에는 지금 당장 입고 나갈 수 있는 옷들이 몇 벌 있지만, 옷장 앞에 서면 항상 뭘 입을까 고민되고, 집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옷을 관찰하고 또 옷가게 앞을 지나가면 한 두번씩 슬쩍 쳐다보게 된다.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위의 견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얘기야 지금까지 나도 생각해봤던 점이었지만, 세 번째 주장은 꽤 신선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에로티시즘이라고 해서 반드시 섹스를 이루어내기 위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경우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외출할 때, 누구를 만나러 갈지에 따라 의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성끼리 만나는 경우와 이성을 같이 만날 경우의 옷차림이 다를 것이고, 동성끼리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가는 목적지가 어딘지에 따라 옷차림이 또 달라질 것이다. 이 점을 왜 지금까지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에 포함시키지 못했을까? 앞으로 옷을 사고싶은 욕망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항상 세 번째 이유를 빼먹지 말아야겠다.

세 번째 장에서는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두 명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키워드는 바로 ‘허영’.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287쪽)

위 인용문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의 다른 책들을 전에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위 인용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내 내면의 허영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것일까. 순수하게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주변 친구들과 나 자신을 ‘구별짓기’하고 싶은 욕망을 눈감을 수가 없다.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를 읽는 친구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은 절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 같다. 어제 밤에도 친구와 책에 관한 얘기를 하는데 친구가 스피치에 관한 어떤 책을 추천했고, 나는 실용서는 보지 않는다고 말하며 친구의 추천을 거절했다. 독서에 대한 나의 취향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외를 꾸준히 하면서, 부유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모자르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있는 내가 왜 자꾸만 돈 문제를 가지고 내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하는 걸까. 모두 나의 내면 속 허영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 같다. 슬프다. 갑자기 글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이런게 저자가 말했던 불편함일까.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었지만, 자본주의는 물론 나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던 책이다. 이제 그만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