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무늬』 -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기

독서기록2013. 11. 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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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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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시기는 5년 전이다. 스물한 살이던 그 시절, 과 선배 자취방에서 고종석의 책 '감염된 언어'를 발견했다. 꽤나 흥미로운 제목이라 읽기 시작했던 그 책을 접하며 나는 고종석의 팬이 됐다.


'자유의 무늬'는 고종석이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신문 및 각종 지면에 발표한 글을 묶은 책이다.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고종석의 사상이 책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 그리고 고종석의 사상은 꽤나 일관적이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화신인 그에게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 특히 민족주의는 혐오 대상이다. '자유의 무늬'에 수록된 여러 글에는 이러한 그의 사상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나 역시 그 사상을 따르는 독자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글들을 읽었다.

가장 마음에 들어온 글은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기'였다.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본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즉 문화로서의 전체주의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진리의 전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자유나 평등이나 민주주의나 인권이나 환경처럼 보편적이라고 알려진 가치들에 대해서까지도 이성의 계산기를 다시 들이대며 그것들을 섬세하고 구체적인 윤리의 체로 밭아보는 것이다. 민족이나 통일이나 애국이나 스크린 쿼터 같은, 더 유동적이고 제한적인 가치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의 무늬' 143쪽

날이 갈수록 내 안의 회의주의, 혹은 의심은 강해져만 간다. 그 대상은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것들부터 시작해, 애국심이나 민족의식, 동기동창 문화 등 일견 보기에 긍정적인 가치에까지 미치고 있다.

문득 고종석의 책을 읽던 와중, 내가 그의 주장과 사상에는 회의의 칼날을 들이민 적이 없다는 자각을 했다. 5년 전 그의 저서를 만난 이래, 그의 주장과 글은 항상 나에게 모범으로 다가왔으며 내가 따라야 할 진리였다. 

이제 '고종석이라는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될 준비를 해야겠다. 그도 결국은 불완전한 인간이며, 트위터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인격은 사실 그리 존중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것 같다. 다만,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글쟁이 고종석의 모습은 꽤 오랜 시간 내가 따라야 할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꺾여들어가는 내가, 벌써부터 집중력과 독해력 그리고 텍스트를 꿰뚫는 안목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약해졌다. 

산발적 텍스트와 하이퍼링크를 보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일관적이고 선형적인 텍스트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겠다.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 - 동양적 상상력의 매력을 찾는 첫걸음

독서기록2013. 2. 21. 03:58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 신화학자 정재서 교수가 들려주는
정재서 지음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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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이 정말 많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먹을 것, 입을 것, 지낼 곳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으로 여러 가지 바라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한 욕구들 중에는 아마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듣고 싶어하는 욕구도 있나보다. 흔히 주변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등장하는 단골 장면이 바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말씀해주시는 장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 넘쳐나는 게 이야기이다.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제 열풍이라고 하기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트위터, 페이스북 등 최신 SNS도 결국 이야기가 오고가는 장으로 자리잡아가는 모양새다. (정보의 바다라는 별명처럼, 인터넷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여전히 정보전달이긴 하지만.)  

아마 사정은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살던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다 보면 소문이 되고, 민담이 되고, 설화가 되고,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옛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테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정말 많았을텐데, 우리 주변에는 왜 이다지도 서양 신화들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까? 서양 신화라기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런 현상에 관해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독후감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니 넘어가자.  

이 책.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은 바로 이러한 우리 상황에서 출판된 보물같은 책이다. 맨 뒤 '이야기를 마치며'에서 밝히듯이, 글쓴이는 서양의 신화와 마법담만 넘쳐나고 동양의 상상력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우리 현실에서 상상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이 책을 썼다.  

그런 마음을 먹고 쓴 책이라그런지, 동양신화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양한 삽화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소개되어있다. 혼돈의 시기를 거쳐 거인 반고가 쓰러져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낸 여와 등 여신들의 이야기와 온 세상의 통치자 황제 등 남신의 이야기를 거쳐 세상만사 온갖 사물들을 관장하는 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까지를 소개해준다. 거기에 더해, 옛 사람들의 상상력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기록, 신기하고 별난 사물들, 하늘 위 낙원과 땅 밑 지하세계까지 이 책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 한 단락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동양의 옛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계를 한 바퀴 쭉 관람하고 온 느낌이 들었다. 때때로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들과 놀랍도록 흡사한 내용들에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고, 그쪽 신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자연친화적이며 순수한 마음씨를 만날 때마다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다니, 또 역시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무슨 책을 읽든 이렇게 무거운 주제로 연결시키니 이것도 병이다. (본문에 나오는 굴굴이라는 동물이라도 기를 수 있다면 좋겠다. 너구리같이 생기고 흰 꼬리에 말갈기가 있다는데, 기르면 어느 순간에 근심이 없어진다고 하니까^^.........)  

사실 작년에 사기를 읽을 때 든 생각인데, 은 주왕과 주 무왕의 왕권교체기를 다룬 부분을 읽을 때, 만화 봉신연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생일 때 그 만화를 봤으니 적어도 8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은주역성혁명 시기를 접할 때면 그 만화를 떠올린다. 만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 이런 신화 책 속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데, 이럴 때마다 일본 문화산업의 강력함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심지어 작년에는 「중국 고전을 원작으로 각색한 아니메(Anime)의 개작 메카니즘 연구」라는 석사논문까지 나왔다.(바로가기

우리나라에서도 문화 산업의 육성과 경쟁력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실 과거 몇몇 드라마의 수출과 현재 아이돌 가수들의 해외진출을 빼면 이렇다할 '내용과 이야기'를 갖춘 문화는 없어보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좋은 출발점으로 바로 이 책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동양의 전설과 이야기는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구닥다리도 아니며, 서양 신화보다 격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훨씬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몸짐의 이야기 보따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적인 것이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며, 동양적인 것도 물론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화와 이야기가 여러 방면에서 중시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서양 이야기에서만 해법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살아숨쉬고 있는 동양 신화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보자. 출발점은 물론 이 책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 작은 오류 지적 하나만 덧붙이겠다. 427쪽에서 틱장애가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증세'라고 설명되어있는데, 잘못된 섦여이다. 틱장애는 눈 깜빡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체부위에서 나타나며, 특정한 말이나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뱉는 음성 틱장애도 있다.(더 자세한 설명은 네이버에서)

읽은 기간 : 2011 01 03 ~ 2011 01 08

정리 날짜 : 2011 01 08


『정의란 무엇인가』 - 방향은 주어졌다.

독서기록2013. 2. 21. 03:57

*2011년 1월 4일 작성했던 글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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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년, 각 분야별로 베스트셀러는 나오게 마련이다. 2010년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를 꼽는다면, 5월 출판 이후부터 계속해서 화제가 되었던 책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사회과학서적이 종합 1위를 하는 현상을 보여준 '신기한' 책이다. 사람들은 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어떤 정의를 바라는 것일까?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의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하고 각각의 정의론들이 서로 싸우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행복'이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입장은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하는 공리주의 진영이다. 두 번째로 개개인의 '자유'가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은 칸트와 롤스가 대표하는 자유주의 진영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을 기반으로 사회적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는 세 번째 진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이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핵심적인 두 문장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행복, 즉 공리의 질적 차등성을 무시한 벤담의 무차별적이며 계량에만 의존하는 공리주의와, 행복(공리)들 사이의 질적 차등성을 인정하며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밀의 공리주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밀은 공리주의를 끝까지 지켜내려고 했다. 그러나 밀이 공리주의의 천박함을 옹호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였던 '질적 차등성의 인정'은, 되려 공리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는 사람 100 명을 세워놓고, 'MBC 음악중심' 방청권과 예술의전당에서 현재 공연중인 '강남심포니 2011 신년음악회' 입장권 중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은 음악중심 방청권을 받겠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욕구는 더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이나 욕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이상적 판단으로 옮겨간다. 밀은 어떻게든 공리주의의 천박함이라는 혐의를 벗기려 애썼지만, 되려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로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입장은 어떨까. 얼핏 생각해보면 칸트의 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한 데 모아서 서술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바로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칸트의 도덕법을 따르거나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도덕적 정언 명령을 따르라는 칸트의 윤리학은, '강요 없는 완벽한 자율'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에 맞닿는다. 또한 사회적 체제의 원리와 특성은 물론 신체적 특징이나 성격 등 자기 자신의 상태까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무지의 장막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롤스의 정의론은, '지금', 그리고 '여기'의 정의를 말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의 매킨타이어와 동행한다. 정부가 특정한 가치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인 교육을 '시민교육'의 차원으로 설명하는 주장을 펼친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삶에 개입해 올바른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서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 개념이 등장한다. 

  
 
(311쪽)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312쪽)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만나며 성장한다. 가장 원초적으로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당연히 부모의 경제적 배경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태어난 지역을 선택할 수도 없다. 따라서 경제와 복지, 주변 시설을 선택할 수 없다. 이렇듯 수많은 것들을 안고 태어나는 우리가, 정의관을 구축할 때 과연 전적으로 순수하게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공동체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받고 태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부정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릴 뿐이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361쪽)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다수의 행복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어버리고 인간 행위의 다양한 가치를 무시한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공리주의의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개인들의 취향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정의론은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 삶에 대한 신념 등을 포함하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무릇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 같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글을 처음 쓰면서는 간단한 감상문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전체적인 내용 요약이 되어버렸다. 내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라는 명성을 획득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정의에 관한 토론 현장으로 안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본위에 기반하는 개인주의도 확보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자들이 넘쳐난다. 공동선을 말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힘든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들의 생각 변화를 유도한다면, 공동선을 향한 정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젠가는 다수의 목소리가 될 날도 올 것이다.

 


읽은기간 : 2010 12 30 ~ 2011 01 02

1차 독후감 : 2011 01 04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흑백과 빨간색을 넘어서기 위하여.

독서기록2013. 2. 21. 03:56

*2010년 12월 26일 작성했던 글입니다*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손석춘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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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리뷰를 쓴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었던 문제들때문에 9월부터 최근까지 많이 힘들었고 방황했다. 11월 말부터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잉여력'이 잔존하고있다. 이 리뷰를 쓰면서 얼마 안 남은 그 기운을 떨쳐낼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책을 들여다볼 만한 독자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해방 이래 흑백논리와 색깔공세로 점철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1945년 해방정국 시기부터 시작된 흑백과 빨강의 협공은 차차 줄어들었으며, 1987년에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소망이 '표면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 탓일까? 그 후 민주주의 논의는 왠지모르게 낡아빠진 인상을 풍기는 논의가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가꾸어가는 것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든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고, 2008년 보수정권이 정권을 다시 잡게 되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민주주의가 사실은 표면적으로만 보장되어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바로 그런 흐름을 따라 2008년부터 민주주의를 다루며 고민하는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왔고,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참 읽기 쉽게 쓰여졌다. 머리말에 명확하게 밝히고 있듯이 10대가 읽을 수도 있도록 쉽게 쓰여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쉬운 와중에 명확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점은 '여는 글'이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어모을 만큼 잘 썼다는 점이다. 자기계발 서적의 대부라고 할 만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시작하는데, 그 책에서 제시한 '원칙'을 정립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했던 나로서는 눈에 확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꼭 해당 책을 언급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니다. 넘쳐나는 자기계발 메세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흥미를 느낄 만한 '여는 글'이다.

이어지는 본문은 모두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언급한 '7가지 습관'에도 대응되며, 또 닫는 글에서 마무리하듯 '무지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각 장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우리 삶에 직접&간접적으로 연관되고 있으며, 또 그러한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힘들지만 가치있는 일이라는 주제를 인생, 싸움, 대화, 정치, 경제, 주권, 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나간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5장 '민주주의는 경제다'와 이어지는 6장 '민주주의는 주권이다'였다. 

  
 

(168쪽)정치와 경제를 나눠서 대학에서 전혀 별개로 가르치고 서로 연관성이 없는 듯 사고하게끔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치밀한 노림수입니다. 누구일까요? 현재의 경제 질서가 흡족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치인 동시에 경제임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정치 경제 체제인가를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0대들이나 분별력이 부족한 일부 독자들이 자칫 심각한 음모론으로 독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꼭 틀린 말도 아닌것 같다. 실제로 고전경제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은 밀의 역작은 제목이 '정치경제학 원리'였다(원저명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188쪽)노동자는 여러 직업으로 나누어지지만 분명히 짚어 둘 게 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이지요. 일터에 나가 일(노동)을 하고 월급(임금)을 받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노동자'이니까요. 흔히 '노가다'로 불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일용직 노동자만 노동자가 아니죠. 
  

 

얼마전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나온 말인데, 우리나라 보수층의 교육 정책과 교육 내용 장악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음에 드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참 대단한 성공 아닌가? 사회복지의 개념과 유형, 그리고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는 않지만 학생들은 딱 한 단어로 복지 축소가 올바른 정책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복지병'.  
교실에 앉아있는 30여 명의 학생들 중 절대다수가 노동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노동자라는 단어에 어느샌가 부정적이고 힘든 일생을 살다가는 그런 인상을 성공적으로 입혀놨다. 노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노가다'와 '막일'을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본문에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급훈을 듣고 공부하는 아이들은 생각이 어떻게 될 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듯하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책이다. 진보와 개혁을 바라는 나같은 독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며, 자신을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약간 불편하지만 큰 무리 없이 읽으며 자신의 시각을 조정하 수 있는 책이며, 스스로 우파 혹은 보수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더 불편하겠지만 화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다. 누가 읽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민주주의에는 적어도 일곱 빛깔이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흑백과 빨강이 얼마나 우리 삶과 민주주의를 옥죄어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전문을 아우르는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순우리말의 적극적인 사용이다. 이 책을 한 번 정독한다면 전에 알지 못했던 순우리말을 적어도 두 단어 정도는 알게 될 것이다. 

 

읽은 기간 : 2010년 12월 20일 ~ 2010년 12월 25일  

정리 날짜 : 2010년 12월 26일

 

『나의 개인주의 외』 - 이기주의자가 아닌 개인주의자가 되자.

독서기록2013. 2. 21. 03:55

*2010년 11월 8일 작성했던 글입니다*

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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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의 『생각하는 힘』을 읽고 소세키에게 관심이 생겼다. 도서관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검색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원래 문학작품보다 비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당연히 이 책에 흥미를 느꼈고, 소세키의 소설 『문』과 함께 이 책을 빌렸다.  

옮긴이는 이 번역작업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국내 독자가 소세키의 작품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15쪽) 나는 소세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이 책을 읽었을 때 분명 무언가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고, 많은 것을 얻었다.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 1년 전인 1867년 태어나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설명이지만, 소세키는 근대 일본이 형성되었던 의미있는 시기를 살다 갔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개화가 진행될수록 경쟁이 점점 격렬해져 생활은 마침내 곤란해지리라는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93쪽) 

일본인 절대다수가 동아시아 최후진국이었던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상황을 자축하기만 하던 당시, 소세키는 일본의 개화가 내부의 힘으로 이루어진 서양의 개화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고, 그러한 자신들의 상황을 공허감,불만,불안의 상념을 품지 않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103쪽) 

특히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욕망에 사로잡혀가는 사회를 정확히 바라보았던 소세키는, 국산 담배와 수입 담배의 예를 들며 불필요한 경쟁심에 사로잡히며 사치스러워지는 인간을 바라본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완전히 바꿀 것처럼 모두가 말하고 있는 지금, 이 부분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전체를 인용한다. 

적극적 활력의 발현 편에서 보더라도 이 파동은 동일한 형태로, 요컨데 지금까지는 시키시마인지 뭔지를 피우며 참고 있었는데 이웃 남자가 맛 좋은 듯 이집트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역시 그쪽을 피우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피워보면 분명 그쪽의 맛이 좋습니다. 결국 시키시마 따위를 피우는 사람은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무래도 이집트 담배로 옮겨 피워야 한다는 경쟁심이 일어납니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사치스러워집니다. 도학자는 윤리적 입장에서 항상 사치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는데 자연의 대세에 반한 훈계이므로 언제나 실패로 끝나리라는 점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어느 정도 사치스러워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 이 정도로 노력을 절감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도 그 고마움이 수긍되지 않고 이 정도로 오락의 종류와 범위가 확대되어도 전혀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 고통 위에 '대단한'이라는 문자를 부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개화가 낳은 일대 패러독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94~95쪽)

나는 정치나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라 자처하지만, 첨단기술의 수용에서는 보수적이다. PMP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도, DMB기술이 상용화에 돌입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스마트폰이 시장을 넓혀가는 이 상황에도...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기술에 의존해서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인지 나는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쓰느 사람들이 얼마나 그 기계의 혜택을 누리는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계에 얼마나 종속되어가는지도 심심찮게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언젠가 결국 나도 스마트폰 사용자가 될 것이다. 컴퓨터 혹은 PC가 이렇게나 우리 삶에 파고들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자연의 대세에 반한' 훈계는 오래 가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나는 가능한 한 오래 스마트폰 사용자로 가지 않으련다. 

요즘 우리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인지라 잠시 다른 얘기를 했다.

여섯 편의 글이 실려있는 책이지만 '나의 개인주의'를 제목으로 택하고 있는만큼, 「나의 개인주의」가 가장 중요하고 또 의미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개인주의라 생각한다. 이기주의와 구분되는 개인주의말이다. 이기주의가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득과 욕구,욕망만을 추구하는 태도라면, 개인주의는 뿌리 없는 개구리밥처럼 아무렇게나 방황하던 태도(51쪽)를 버리고 미세한 물방울이나 안개 때문에 번민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여기다'하고 파낼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한(57쪽) 태도를 말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해야 하며,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고자 할 때 수반되는 의무를 생각해야 하며, 금력을 휘두르고자 할 때도 따라오는 책임을 중히 여겨야 한다.(64쪽) 쉽게 말해 타인을 존경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존경한다는 것(68쪽)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과연 자기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세우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광고와 유행에 휘둘리는 개성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바라는 것에 기초한 개성을 발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확고부동한 자존감이 없기에 사람들은 유행하는 옷에, 값비싼 명품에, 최신 전자기기에, 인맥에, 학벌에 의존해 자신을 내세운다. 그런 와중에 타인의 개성을 배려할 줄 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아보인다. 진정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야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의 주체성, 타자와의 개방적 관계를 항상 추구하는 나에겐 참 읽기 좋은 책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소세키의 문학 작품으로도 진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정체성』 - 한국적인 것이란 존재하는가?

독서기록2013. 2. 21. 03:54


한국의 정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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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때도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과연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책은 위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책은 아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기반 마련을 해주는 책이다. 각 장의 제목을 살펴본다면 이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장 :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2장 :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3장 : 정체성 판단의 기준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대체 어떤 문제인지를 첫 장에서 소개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위 제목이 암시하는 방향과는 약간 다르게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부분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설명하는데,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고유성, 창의성, 주체성' 이렇게 세 가지이다.

3장에서도 마지막으로 다루어지는 주체성은 이 책의 후속작으로 봐도 무방한 『한국의 주체성』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책의 구조와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럼 각 장의 내용을 조금씩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나의 생각을 덧붙여보겠다.
 


먼저 제1장.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정체성 문제가 사실은 아주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같이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다루는 문제는 수천 년 간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간과하고 그저 '한국의 정체성'이 우리 마음대로 고민하다보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인 양 고민해왔다. 저자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와 같은 태도에 비판적인듯 하다. 
또한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이다. 대다수 미국의 시민들이 각각 제국주의자가 아닐지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는 분명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SK가 현재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팀일지라도(2010년 10월 3일 현재. 준플레이오프 진행중. SK는 정규리그 1위) SK 소속 선수가 모두 각 포지션에서 한국 야구 최강의 선수는 아닐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특성이 한국이라는 집단을 확인시켜주며 그것이 정말 한국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저자의 실수 혹은 혼란을 볼 수 있다.  

43쪽, 나는 한국을 다른 나라나 민족과 구별짓는 특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국의 언어인 한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각 분야가 공통으로 갖는 속성이나 성질이다. 물론 한국어도 한국이 갖는 여러 공통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한국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이제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자. 첫째, 언어이다. 국어야말로 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유일의 한글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글로 한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마치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원 확인에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은 그 번호가 다른 것과는 같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뭉니다. 즉 유일성에 의한 구별 방식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유일한 표기 방식을 자랑하는 한글이 이 번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당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뜨거웠을 때라는 점을 배제하고서라도 한국어는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저자는 한국어로 시작한 말을 어느샌가 한글로 바꾸었고, 그 둘을 완벽하게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듯 하다. 그러나 한국어와 한글은 분명히 다른 대상이다. 입말인 한국어와 글말인 한글은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는 두 대상이다. 물론 한국어를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글말이 한글이라는 사실이야 부인해서는 안되겠지만, 다른 대상은 분명 다르게 생각해줘야 한다. 두 번째 비판사항은 더이상 한글이 한국어만을 표시하는 글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소수부족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 표기방법으로 채택하였다(관련기사 바로가기). 1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을 들이대 비판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행위이지만, 이 책이 계속해서 유효성을 유지하려면 이 부분만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제2장. 한국적인 것이 과연 세계적인 것인가? 

저자는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철수, 영희, 민수는 존재할 수 있더라도 '인간'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페이겔스의 글을 인용해 글을 전개해나간다.

60쪽, "~(앞부분 생략) 이 인간적으로 창조된 질서는, 인간 의식의 변화하는 의도적인 시스템-믿음, 소망, 생각 그리고 감정-을 반영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영원한 자연 질서와는 달리). 그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이며,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이해된다." 그는 자연과학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인문학의 보편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용 부분이지만 저자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실제로 단어의 뜻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동시대에 같은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주는 단어의 존재는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치'란 결국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의 존재 또한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것' 다시말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세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보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했으므로, 세계적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장은 예상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것의 정체는 '미국적인 것'이다. 

74쪽, 따라서 세계화란 미국화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세계화란 보편화라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란 미국화라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즉 세계화란 미국화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과제는 분명해졌다.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각기 알아낸 후, 우리 안에서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우리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상품을 개발해 그것을 수출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모두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어서 제3장. 정체성 판단의 기준 :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는 고유성과 창의성은 한번에 다루어보자. 우리는 고유성을 생각하면서 시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이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땅에 포도라는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20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프랑스 포도주는 왜 다른 모든 지역을 제치고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는가? 이는 프랑스 지역 사람들이 포도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재배하고 또 그렇게 재배한 포도를 이용해 독자적인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외부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얼마나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독창적으로 가꾸었는지가 고유성 판단의 기준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를 독창적으로 고유화했는지 아니면 퇴락시켜버렸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나에겐 참 혼란스럽다. 내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한다. 

97쪽, 그럼 문화의 창조적 수용과 퇴락의 기준은 무엇인가? 위의 예를 통해 보면, 보편적 가치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로 보인다. 바둑의 경우 잡기보다는 도예가 더 높은 가치이며 보편적이다. 또한 유교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것보다는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더 높은 보편적 가치이다. 문화의 현상적 차이와 구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경험론자의 입장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나 흄의 동시대인과는 달리 희랍인들은 남색을 권했다. 흄은 이것이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리고 충실함의 원천으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남색 자체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지만, 남색의 바탕이 되는 성질들 즉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릐고 충실함은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에서 존중받는 것"이다. 이런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지금까지의 관찰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보편적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로 이름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정하거나 평가를 할 때 편의상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쓴다. 창조적 수용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적 수용의 기준은 인류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일반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치훈처럼 도 닦는 자세로 바둑을 두는 개별자가 존재한다. 인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억압받는 개인은 존재한다. 

2장에서 보편성을 다룰 때는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하고, 이어서 보편적인 것 즉 '세계화'란 '미국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존재하지는 않지만 추상적으로 이름만 있는'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다.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2장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과 3장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것'이 서로 약간 다른 개념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분명 지금 내 생각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부분. 현재성과 대중성과 주체성이다. 

어렵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표제어 자체가 워낙 명시적이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성은 말 그대로 '지금' 한국에서 유효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의 유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 우리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 탐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반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생각해봐야 할 항목이다.대중성도 마찬가지로 명료한 개념이다. 저자는 대중문화를 절대 무시할만 한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무엇인가'이며, '시대의 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108쪽) 마지막, 주체성. 딱히 할 말이 없다. 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인데, 주체성 항목은 이 부분에서 다루기보다는 다음 책을 통해 고민해보는게 좋겠다.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한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책이다. 내 나름으로도 이 책의 형식을 흉내내어 서론부에 전반적인 조감도를, 각 부를 다룰 때도 초반에 안내사항을 게시하려고 노력해봤는데, 다시 읽어보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3장 마지막 부분에 보편적인 것을 논하는 부분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질 못해서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글을 '간단하게'쓰는 능력을 연마해야겠다. 불필요하게 긴 글이 되어버려서 혹시라도 읽으실 분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읽은 기간 2010년 9월 21일 ~ 2010년 9월 23일 

정리 2010년 10월 3일

『거꾸로 읽는 세계사』 - 7년만에 다시 만난 내 인생의 첫 번째 사회과학서적.

독서기록2013. 2. 21. 03:53

*2010년 9월 24일 작성한 글입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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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리뷰에서도 두세번 언급했지만 책과는 '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댐을 쌓고 지냈던 내 학창시절, 나도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이 책을 읽었다.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꺼내고 자리에 앉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정말 그 시절 내 생활습관을 생각하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체 난 왜 이 책을 읽었던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만남이었지만, 그 책에서 나는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고, (그때는 '어 이름이 시민이네?ㅋㅋㅋ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책장을 덮는 동시에 그 이름도 내 인생에서 잊혀졌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컴퓨터공학도를 꿈꾸던 중학생은 사회정의와 인문정신에 대해 고민하는 영문학도로 바뀌었고, 참여정부 핵심인물 중 한명이었던 유시민은(물론 난 그당시에 유시민이 그런 사람인줄 전혀 몰랐다.) 또 다른 정당의 중심인물로 현재 한국정치계의 한 축을 떠맡고 있다.(아직은 미약하지만...) 

다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드레퓌스사건을 내가 알고 있던 이유는 이 책 덕분이었으며,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기 전부터 베트남전쟁에 대해 이유모를 부정적 느낌을 갖고 있던것도, 영어 이름에서 성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도 다 이 책 덕분(때문?)이었다. 내가 먼 훗날 『청춘의 독서』와 같은 책을 쓸 수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 책이 포함될 것이다. 유시민에게 리영희가 그랬듯, 나에겐 유시민이 사상에 은사인 것 같다. 의식화의 원흉까지는 아니지만.. 왜냐면 그때 난 의식을 가질 수 있을만한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분인데,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가 서술한 내용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서술이었다. 70년대 당시 다니엘 엘즈버그가 폭로한 미 국방성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리영희가 우리나라에 베트남전쟁의 실체를 전달했고, 리영희의 책을 읽은 유시민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읽기쉽게 재구성해 자신의 책에 썼다.   

별 대단한 일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느낄 수 있었을 때,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지식, 사실, 혹은 진리가 사람과 사람, 책과 책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7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그동안 워낙 많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처음 읽는 느낌이었다. 다시 7년 후면 내가 서른이 된다. 그 때 이 책을 다시 읽어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물론 이 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색다른 느낌이겠지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제목 그대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해봅시다.

독서기록2013. 2. 21. 03:49

2010년 8월 25일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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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나는 아직 20대 초반이다. 우리 20대에게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나는 어릴적부터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자랐고, 지금도 사회적 불평등을 보면 혼자서 고민하고 고뇌해왔다. 그런데 갈수록 그 강렬함이 약해지는걸 느낄 때마다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만 느껴졌는데, 모처럼 그런 느낌들을 되살릴 수 있을만한 좋은 책을 만났다. 참 잘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 아쉬운 점은 왜 작년에 미리 이 책의 모태가 되는 민주주의 특강을 알지 못해서 직접 참여할 수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어찌하랴. 이 책으로라도 다시 생각을 일깨우고, 또 다시 언젠가 그때와 같은 민주주의 특강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 자주 열려서야 안되겠지만... 사람이 아플 때 병원을 가듯, 민주주의가 아플 때 민주주의 특강이 열리는 법 아니겠는가?  

모두 12명의 저자가 참여했는데, 정말 화려하고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도정일, 한홍구, 박명림, 정희진, 우석훈, 김상봉, 김종철, 오연호, 진중권, 홍성욱, 김찬호, 박원순.. 이들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한번 일깨워줄 지 기대하며 책표지를 열었다. 12명의 저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각자 몸담고 있는 분야가 다르기에 그 분야도 참 다양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흐름을 돌아본 한홍구선생님의 글부터, 정치, 경제, 교육, 법, 언론, 미디어, 과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되돌아볼 수 있게 쓰여졌다.  

어떤 분의 글인지 하나하나 나열하기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순서대로 책을 다시 보며 인상적인 구절들을 옮겨적고, 그에 대한 생각들을 같이 적어보겠다. 

46쪽, 1990년대 이후에 학생운동의 쇠퇴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당연한 겁니다. 시민사화의 다른 세력들이 성숙하지 못해 지나치게 많은 지을 부여받았던 학생들이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그 짐을 벗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한국 사회가 너무 급격하게 변하다 보니까 여러 다른 요인과 학생들의 탈정치화가 맞물려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뿐입니다.   

 -> 우리 시대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왜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가에 대한 많은 이유 중에서, 지금의 현상만을 보고 진단내렸던 다른 많은 의견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분명 있다는 점을 알고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물론 이러한 상황 자체는 절대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는 왜이리 무관심한 태도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할까? 

55쪽, 직접 주인으로서 참여할 공간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서울 시장 선거에 20대가 나가서 발랄하게 도전해보면 안 되나요? 

-> 지난 6.2지방선거때 우리 광명시에서 20대 여성 시의원 후보가 당선됐다. 당선 소식을 듣고는 앞으로 쭉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내 생활에서 그 시의원에 대한 관심은 멀리 쫓겨나버렸다. 다시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 

60쪽, 우리는 통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는 더욱 그렇죠. 

-> 지금 내가 중학교에서 공익근무를 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과연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받았던 규제들, 그리고 지금 학생들이 받고 있는 규제들은 정당한가? 난 항상 궁금하다. 넘어가면 안 되니까 담장을 세운 것인지, 아니면 담장을 세워 놓으니까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학교 내에서 규칙을 세우고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관계자들(단순히 교내 선생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이 부디 아이들의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사고능력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방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학교라는 공간 내부에서 공존하는 교사집단과 학생집단이 왜 서로의 요구를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한 집단이 일방적으로 다른 집단에게 억눌려야만 하는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9쪽, 기업, 언론, 교육, 종교, 금융, 통신, 유통, 법률 같은 영역들은 역민주화 또는 역근대화하면서 점점 더 소수 상류층에게 권력과 재화와 가치가 집중되었습니다. 지나친 과두화라고 할 수 있죠. 사회 주요 부문의 과두화가 진행될수록 정부와 이들의 갈등도 커졌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과두화의 공존이자 충돌이죠. (....)결국에는 민주정부가 이들 과두세력에게 포위된 섬이 되어버린 거에요. 

->강렬한 충격. 우리 사회를 민주화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력한 한 방을 선보이는 부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가 갑자기 거꾸로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원래 우리 사회 자체가 아직은 비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단지 그 비민주적 방법이 권력자들에 의해(시간이 갈수록 그들 중에서도 경제권력자들에 의해) 교묘해지고 세련되졌기에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거기에 더하여 민주'사회'를 만드려는 민주'정부'의 노력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이미 민주화 된 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까마귀 백 마리 있는 곳에서 백로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낸다면 단연 백로의 울음소리에만 우리 신경은 집중될 테니까... 

79쪽, 학원 경영과 인터넷 강의, 논술 시장을 비롯한 사교육을 주도하고 참여하는 세력은 거의 386세대입니다. (...) 저는 이 공동체에서의 삶을 이토록 비인간화하고 불안하게 만든 데 대하 386세대가 앞으로 역사 앞에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정말 두렵습니다. 

->학교에 근무해서 더 심해진 것이 하나 있다면, 아이들 교육에 대한 내 관심이다. 작년 1월 공익근무를 시작하기 전에도 항상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나 자신이 사교육시장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씁쓸했지만(영어과외를 쭉 했었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지난번 조선일보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바로가기) 거기에 이 기사까지..(바로가기) 학원 강사들에게 왜이리 공격을 퍼붓는가 싶었는데, 그들이 386세대라는 점을 다시한번 인식하자(두 기사 모두 그들의 사상적 배경(?)을 언급하고 있지만, 기사를 읽을 당시에는 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언론들의 공격적 태도가 조금 더 이해될수 있었다. 물론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해였지만.. 

106쪽, 저는 갈 길의 방향을 놓고 소통하는 과정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전제해서는 안 되는 거죠. 민주주의는 목표나 결과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목표나 결과가 아니라고 했지만, 과정의 건강함을 확보하는 것도 목표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도로란 자동차가 다니기 위한 수단이지만, 도로의 완공도 하나의 목표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을 위한 통로가 얼마나 건강하느냐 건강하지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이고, 그 통로에 완벽한 완성은 없겠지만 일정 수준을 향한 목표는(추상적 목표일 수밖에 없지만)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쪽, 제가 생각하는 파시즘의 특징은 혼란을 정리하는 거에요. 혼란을 정리하는 사람이 파시스트이고 권력자이며, 혼란을 조직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동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 : 인기영합주의적 정책이 될 수 있고, 학교별 다른 실정 부분을  다 반영하지 못하는, 또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 간의 정책 의견이 다를 경우에 충돌이 예상됩니다.] 출처 sbs(바로가기) 한국교총 대변인은 위 분류에서 어떤 사람인가? 

109쪽, 모든 발언은 평등해야 합니다. 하지만 평등은 같음이 아니라 공정함입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발언권을 더 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특혜가 아닙니다. 특혜는 조건이나 기회가 같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인데, 사회적 약자는 이미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니까요. 

->평등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앞으로는 이 견해를 항상 마음에 품어야겠다. 그동안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 막연히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큰 진전이 없었는데, 이 글 덕분에 내 머리속 평등이 개념이 조금은 더 분명해졌다.

161쪽, 학벌사회라는 책을 냈는데, 학벌 문제에 대한 현상적인 비판 말고 이론적인 분석을 하겠다고 작심하고서 썼습니다. 

->큰 울림이 있다기보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구별짓기 이론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된다.  

294쪽, 최근에 위험 연구자들은 이런 내용을 종합해서 보통 사람들의 위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열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1.비자발성 2.불평등성 3.위험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 4.새로운 위험일 때 5.인간이 만든 위험일 때 6.감춰지고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일 때 7.어린아이들이나 다음 세대에 지속되는 위험일 때 8.두려운 것일 때 9.과학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때 10.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언제 더 위험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연구결과인데, 매우 인상적이다. 위험이라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상황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 있는 의견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랄 때, 그 사람에게 그 일은 비자발적인가, 불평등한가, 싫을 땐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더 많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다. 

364쪽, 일본의 '가나가와 생활클럽'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공동체' 

->예전에 읽었던 한겨레21 기사가 떠올랐다.(바로가기)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자. 생활협동조합. 아직까지 나의 내면에 남아있는 보수적 기질 때문에 (누구나 보수적 기질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꼭 정치적 의미를 가지느 보수성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 거기에서 이어지는 기존 것들에 대한 친숙함이 보수성 아닐까?)협동조합을 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었는데, 다시한번 노력해봐야겠다.  

 

여러모로 고마운 책이었다. 마음 속 시들시들해져가고 있던 사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줬다. 다 쓰고나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버렸는데, 일단 이 글을 마무리짓는대로 자야겠다. 자고 일어난 내일아침은 분명 이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아침이 되리라 기대하며 글으 마무리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