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워킹홀리데이?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8. 14. 21:39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성공적인' 워홀 생활을 꿈꾸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려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많이 노력했었지만,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약간이나마 부푼 꿈을 안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친구와 친해지고, 실생활에서 영어를 쓰게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실력을 늘리고,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구해 돈도 벌고 경험도 쌓고,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화려한 여행을 하고....

3월 15일 아침에 멜번의 아침을 처음으로 맞이했고 오늘이 8월 14일이니 이제 오늘만 지나가면 정말로 멜번에서 지낸지 5개월이 지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내온 모습들을 앞서 말한 '성공적인' 워홀 생활에 짜맞춰보자니 별로 맞아떨어지는 짝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친구라고 부를만한 외국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생활에서 영어를 쓰기 위해 외국인들과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가려고 했었으나 결국 초반에 영어로 통화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한국인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영어실력을 늘리진 못했구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구하고 싶었기에 처음에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지만, 말도 안되는 다단계 업체부터 시작해 한국 식당, 저녁 체육관 청소, 제가 일을 얼마나 못하는지 일깨워준 난도스, 건물 화장실 청소를 거쳤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원래 아침에 청소만 하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와, (가끔씩 바쁠때만!) 바리스타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돈은 그럭저럭 벌어서 어느새 호주 도착 후 적자였던 통장잔고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여행은 이제 계획을 짜고 있구요..

성공적인 워킹홀리데이 생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외국인 친구'와 '자연스러운 영어 늘리기'는 완벽히 실패했습니다.[각주:1]

이 글은 실패자의 입장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인터넷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워홀 '수기'를 찾아 읽고 계실겁니다. 만일 꾸준히 연재되는 수기가 있다면, 대체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워홀러들의 수기일 것입니다.

성공적인 몇몇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 뒤에,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꺼려하는 수천 수만명의 워홀러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기를 죽여서야 안되겠지만, 출발 전 유학원 설명회에서 들은 바로는 한 해 호주로 입국하는 한국인 워홀러가 '4만 명'이라고 합니다. 과장해서 그들중 절반이 세컨비자를 받는다고 친다면, 한 해에 호주 전역에 대략 6만여 명이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만 명 가운데 성공적인 몇몇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막연이 기대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호주는 영어권 국가이기에 영어는 절대적으로 '기본기'입니다. 여기 와서 영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호주는 영어를 '말하기 위해, 쓰기 위해' 오는 곳이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해봤던 그 어떤 일보다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문화주의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기고 다민족 사회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멜번[각주:2]이지만, 제가 보는 멜번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종에 따른 직업분화와 생활양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편의점 어디를 둘러봐도 백인은 일하지 않습니다. 중국인과 인도인이 일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표면적인 위생과 미화를 담당하는 '큰' 청소일은 백인이 합니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썰렁한 건물에 남아 하는 사무실, 화장실 청소는 유럽계, 남미계 이민자들과 동양인들이 합니다. 동양인들도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에는 동양인도 일합니다. 백인들만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에는 대체로 백인들만 일합니다. 어둠이 내리깔린 도시의 표면은 더욱더 갈라집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그들의 'Dinner'를 즐기는 자들은 백인들입니다. 자국민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 혹은 패스트푸드, 누구나 갈 수 있는 스타벅스에는 인도인과 동양인들이 넘쳐납니다. [각주:3]

이 곳에 오면 저절로 일자리가 생기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혹시 일자리를 얻게 된다면, 처음엔 좋지 않은 근무조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처음부터 모든게 잘 풀리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나라이며, 이곳의 규칙과 분위기를 모르는 초보 구직자에게 좋은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힘들게 생활하실 것을 무조건 각오하시고 오셔야 합니다.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 '누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성적을 올렸다'라는 말만 듣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다음 시험에서 별 재미를 못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어 하나만큼은 많이 준비해서 오시길 바랍니다.[각주:4] 힘들게 생활하게 될 것이라 단단히 각오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부푼 꿈을 한 수 접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냉정히 바라보고, 떠도는 풍문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좌절이 숨어있을지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준비된 분들이라면 저는 실패해버린 위의 목표들을 달성하고 멋지게 워킹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실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 영어실력 '늘리기'에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영어를 매우 많이 준비했습니다. [본문으로]
  2. 위에서는 일반적인 '호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경험한 '멜번'만을 얘기합니다. 다른 도시는 가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3. 멜번이 신분제 사회는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는 있고, 제가 방금 말한것과는 반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들'의 문화에 동참하는 워홀러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생활과 즐거움을 지인들에게 말하고 인터넷에 글로 표현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4. 본문과는 조금 다른 어조 말해보겠습니다. 솔까말 우리가 여기 영어학원에 돈 가져다 바치려고 온건 아니잖습니까? 이왕 온거 이딴 나라에 돈 퍼주기보단 왠만하면 좀 빼먹고 가자구요. [본문으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쓰는 글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8. 13. 14:59

상실의 시대를 읽고 쓰는 글

 

대략 일주일정도 책을 붙들고 읽은 것 같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지 못할 이상한 울림이 내 마음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다. 하루키라는 작가, 그리고 이 작품이 왜 이토록 유명하고 오랜 기간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는지 조금은 알게 된 계기라 생각한다. 사실 트램과 트레인을 타고 이동하면서 읽은 부분도 많고, 예전에 한창 책을 읽던때처럼 제대로 집중하면서 읽지 않은지라 많은 얘기를 풀어놓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3장에 나오는 반딧불이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별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없다. 영문판으로 다시 읽을 계획인데, 그때는 주의깊게 읽어봐야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가장 강렬한 마음속 울림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미도리가 남긴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쓰는편지의 마지막 한 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법한 절망감,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포기가 그 편지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그 전까지 미도리의 당돌하고, 말 그대로 피가 통하는생생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편지 속 그녀는 차분한 말투로 자신의 절망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는데.. 그 말이 왜 이토록 내 가슴에 사무치도록 울리는지 모르겠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와타나베는 결국 미도리를 갈망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만, 마지막 장면을 몰랐기에 미도리가 편지를 써내려가는 그 절망적인 심정이 상상되면서 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읽는 순간 실제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감정을 흔들어놓은 장면이 또 하나 있지만..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다시 쓰고 싶다.

 

이렇게라도 작품에 대한 인상과 감정을 풀어놓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 책에 끌려다닐 것만 같아 빈약하지만 글을 써본다.

2011 8 13일 오후 3 56

 

 

첫 직업의 중요성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7. 9. 19:13
멜번에서 지내면서 느끼게 된 여러가지 것들중 한 가지를 또 끄적여보려고 합니다. 바로 첫 직업의 중요성! 우리나라에 있을때 어른들이 어떤 직업으로, 혹은 어떤 회사를 통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땐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여기 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보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커피스쿨에서 알게된 A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처음 알게되었을때부터 그 누나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하고있었는데, 저는 초반에 바리스타 일을 도전하다가 포기했습니다. 멜번에 도착한지 거의 네 달이 지난 지금 각자 삶의 모습은 3월 그때보다 더 달라진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일 저 일을 하다가 결국 두 군데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고, 그 누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꽤 괜찮은 대접을 받으며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멜번에서 계속 살 생각도 없을 뿐더러 10월이면 런던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그런만큼 이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는 저에게 크게 의미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물론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수는 없고, 또 청소를 하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거리를 많이 얻을수 있긴 합니다만.. 자신만의 기술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여지가 열려있는 바리스타라는 직업과 비교해보면 화장실 청소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네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첫 직업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
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됐습니다. 

멜번을 떠나고, 호주 여행을 하고, 다른 나라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간다면 저는 다시 대학생 신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이런저런 분야에 대한 관심도 많고 흥미도 많지만, 나중에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고싶다는 청사진은 흐릿합니다. 그래도 멜번에서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대학교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어떤 직업을 택할지, 어떤 삶의 방향을 따를지 정말로 신중하게 선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번 글도 마무리가 심심해서 마음에 안들지만.. 이걸로 오랜만에 쓰는 글을 마무리합니다. 

How I have been so far in Melbourne.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26. 16:25

Three and half months have already past since I arrived here. Having meant to write this note on the exact day of turning into 3rd months, due to tiredness, only now I am writing this one.
What have I done in this city? There aren't much things that I can proudly say. I'll just trace back what i've done from the start.

On arrival, I opened a bank account from ANZ, registered a coffee school, and made a mobile phone. I was able to feel full proud of myself; I did all those things with no help, and the teller praised my English, which was the most significant factor to make me confident. Unfortunately, from just 2nd day I started to feel discouraged. The emotional gap based on race was much serious than I just had imagined. I had thought it might be no problem when I got to Australia, which was totally misunderstanding. Still I don't know what it is, and can't explain why I have felt like that, but I just say in that way. So I began to get along with Korean guys and girls like many others do. 

Anyway I had to find a place to live and get a job. Consecutive failure in telephoning made me totally unenthusiastic... and finally I chose to live with Korean guys. (BUT I do NEVER regret this decision. I have learnt more important things than improving English by living with my sharemates).

Next step was getting a job.  I had intended to become a barista in Melbourne having heard that there are plenty of cafes in the city. Practicing to making coffee in the coffee school, I tried to get the position, which was surely supposed to be tough. and finallly I gave up...
To be exact, I had one chance to do trial in a cafe just near Flinders station. Paradoxically, that was when I realized that I would not be able to do it. I was too clumsy like a dumb. What I can now know is, however, everybody cannot avoid being like a dumb at first time. I should have tried more sincerely or.. enthusiastically!

Life is full of what we can't expect. Just after I gave up the job, I was offered to be a salesperson. Honestly I felt really happy to do the work that I was going to make money by 'saying' and 'persuading' people to buy the goods. Alas, it turned out to be a bad job! there was no basic salary, and even the products did never sell well. 
I decided to quit the job after six days. They kept saying to me that 'Today is weird even I can't understand, but tomorrow it will be fine'. I couldn't see 'the tomorrow'. On the last day, I saw my supervisor only managed to earn $96 though we worked for the whole day. 

Luckily, within only one week I found other two jobs; a casual staff at Nando's and a cleaning job in a gym. Doing those two jobs, I could poignantly know that both how I can be seriously incompetent in particular area and there is definitely nothing done by itself. When it comes to the first job, for a period of one and half month I did never well in making burgers and wraps fastly, being scolded everyday. It was surely short period, but I seriously could know how significant it is to work in a field where I want to be , and can feel happy to do the position.
Doing second job, gym cleaning, I was able to be aware of the fact that there should be someone to do 'things'. While others spend their relaxed time or enjoy exciting moments, I had to clean the gym. I had to claen dirts from  those who work out to make their body more healty. For their leisure moment, I needed to put my effort for six days a week. It was something I could never feel when I was in Korea. I thought I became like a slave in archaic greek society. As the slaves had to sacrifice their everything to support a lucrative Athens society, I just sacrifice my time to support some others' pastime. I know now I'm exaggerating my experience. It's just because that's what I think the most proper simile, there being no any political or social meaning. Emphasis should be on my understanding of the fact there was nothing done by itself. Furthermore, living without parents, now I know how my mother and father have sacrificed their own life to support me and my sister, and our laziness. When I had to go somewhere in early time, I needed to wake up just 30 mins: wake up, eat what my mother prepared, wash up, and go out. Now I need to wake up at least one hour before departure. I should fix my own meal and, of course, wash the dishes. Sometimes there are laundry works, and naturally they're on me. 

 Now I'm working at two sites as a cleaner. I can't deny that I feel discontent with this way of living. At the same time, however, I can admit I have learnt so many things that I would never know if I stayed just in Korea.

Due to my lack of writing skill, this note is being written different from what I first meant. Things regarding friendship and normal living will be posted later.
There are many subjects I want to describe. Please wish me luck and vitality that I can continue writing these ones.
And I wish all of you luck on everything you guys are doing.        

p.s) When you find improper word usages or grammatical errors, don't mind letting me know. I'd appreciate you :)                                                                                                                                           

빅토리아주 제2의 도시, 질롱에 다녀왔습니다!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13. 20:39

멜번에서 갇혀 지내다가 간만에 외곽에 나갔다 왔습니다. 예전부터 다녀오고 싶었던 빅토리아주 제2의 도시 질롱!

마셜행 브이라인 기차를 타면 됩니다! 존 1+2까지 포함해서 왕복 13.40불이네요ㄷㄷ
Take V-line train toward Marshall. The ticket includes Zone 1,2 and costs $13.40.

일단은 메트로 트레인과 같은 노선을 따라갑니다.
At first, it follows the same line as Metro.

역 사진을 안찍었네요.. 아무튼 질롱 해변가에 가시면 저렇게 토마스 기차도 다닙니다! 저희는 가난한 워킹이기 때문에 저런데에 돈을 쓸 수가 없지요ㅋㅋ
I didn't take a picture of the station. Anyway, you can find Thomas! but we couldn't take it as we are poor working holiday makers ^^

헬리콥터도 탈 수 있습니다! 그치만 위와 같은 이유로 생략^^
There is also a helicopter you can ride! But we skipped it for the same reason^^.

해변가를 따라선 산책로~
A road along the beach~


질롱 해변가, 질롱 정원 곳곳에는 이렇게 나무로 만든 조각상(?)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 다 올리진 못하겠네요ㅋㅋ
You can find lots of wooden statues like them around Geelong! But most of the pictures taken include my friends, so I can just upload those two pics.

탁 트인게 보기 좋습니다 정말ㅋㅋ
looks good! the wiiiiide skyline and greeeen lawn.


해변가에 위치한 카페인데.. 카페 이름이 기억나질 않네요ㅜㅜGiancarlo는 커피 회사 이름이구요. 그치만 커피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A cafe located near the beach. I can remember the name of the place... Giancarlo is a name for the coffee bean provider. Anyway, the coffee was really really tasty!
 

별다른 설명은 없습니다ㅎㅎ
Nothing special!

질롱 정원으로 고고!
Move toward the Botanic Garden!

와이파이 신호처럼 생겼길래..
seems like WI-FI!

향기가 정말 좋았던 장미꽃. 외롭게 피어있네요ㅜㅜ
This rose smelled fantastic! but it seems little lonely :(

정말 보기 좋았던 뒷모습이에요. 
They looked so much beautiful..!




은행나무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빅토리아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나무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네요!
I was so pleased to see this ginkgo tree! It's one of the significant trees in Victoria state.

생각보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ㅋㅋ
The size of the garden was rather small, but it was a truly beautiful garden.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getting darker!
 


왜 유명한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유명한 이 돌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맨처음에 보는데 우리는 돌아가면서 봤네요ㅜㅜ 
The famous stone in Geelong!(but I don't know why) Most people see this at first, but we could see this on the way back.

기차역으로 돌아가면서..
Way back to the station.

질롱 역에서 5시 33분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온 서던 크로스 역입니다.
We took a train to Southern Cross at 5:33. Here is Southern Cross.

 저녁은 스완스톤 거리에 있는 완톤 하우스에서! 아.. 여기 말고 다른데도 좀 뚫어야 하는데 ㅜㅜ
Dinner at Wonton house on Swanstone St.! I should find somewhere else..... 

저녁까지 먹고 사우스뱅크를 따라 산책을 좀 했습니다. 사실 크라운 카지노도 구경하고 왔지만 배터리가 다 되어버려서 사진을 못찍었습니다ㅜㅜ

Took a walk along south bank. Actually we got to the casino, but due to the running out of battery for camera, I couldn't take pictures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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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를 갔다와서 여행기 형식으로 글을 써본건 처음인데요.. 참 허전하네요ㅋㅋㅋ 여행기라는게 쉽게 쓰여지는게 아니군요ㄷㄷ
It's my first time to write this kind of article. I mean.. journey? This is too lax.. I hope I can write this kind of articles more wonderfully next time:)

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13. 16:45

나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다. 대체로 정이 많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만 때때로 모질게 이기적이고, 대체로 양심을 따르며 규칙을 준수하려 하지만 때때로 정해진 것들을 거부하며 파괴적인 방향을 지향하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쨌든 이상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이상한 점이 많으면서 동시에 생각도 많은 나에게 영어는 참 성가신 존재다. 어릴때부터 좋아했기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 덕분에 한국에서만 공부한 학생 치고는 괜찮은 영어를 구사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네 영역 모두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런데 영어의 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땅에서 영어가 일상생활에 얼마나 스며들고 있는지를 발견할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우리말을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쯤 영어와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논리적인 흐름이나 어투가 조금 어색하고 조잡해 부끄러운 글이다. 짧은 글은 아니지만 여기에 붙여보겠다.

 
저 글을 쓸 당시보다 지금은 약간 입장이 유연해진 편이다. 언어의 역사를 아주 잘 알고있는것은 아니지만, 천 년 넘게 라틴어가 유럽의 사상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떤 언어가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 후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회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영어가 이렇게 절대적 힘을 유지하는것도 언젠가 끝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게 바로 조금씩 주관을 잃고 세상과 타협해가는 사고의 흐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하기도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나름 부딪치며 살아가다보니 점점 이렇게 변해가는 나를 부정할수 없다.

어쨌든 영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나조차도 호주에서 영어로 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사고방식을 엮어가는 통로에 영어가 자주 끼어들고 있다는걸 느끼고 있다.

자동차 클리너 판매 일을 하던 시절, smog라는 단어를 하루종일 말해야만 했었다. '이 제품으로 화장실 유리를 닦으시면 성에가 끼지 않습니다' 라는 내용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집에 돌아와 같이 사는 형들에게 그걸 설명하는데, smog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하는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고, 잠깐 고민하다가 내뱉은 말이 '안개'라는 단어였다. 화장실 유리에 안개라니.. 

영어가 내 사고의 흐름에 파고들고 있다는걸 처절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친구가 생일이라 생일 축하 전화를 했다. 나는 장난삼아 그 친구가 전화를 받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는 몇 마디를 영어로 쏟아부었다.

장난삼아 한 행동이긴 했는데, 대체 왜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 내가 대체 왜 그런거지?'

한국인 형들과 살면서 영어가 일상 언어로 자리잡지 않았지만, 일하는 환경에서는 어쨌든 영어를 쓰고 있는 나. 호주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영어가 귀와 입에 익숙해지는걸 느낀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영어가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영어가 나를 지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면 참 이상하다.

난 분명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영어를 섞어서 쓰는 사람을 무지 싫어했었는데..
순 우리말 개념어를 더 힘있게 보강해서 우리가 홀로 학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에 나는 오늘도 조금씩 빗장을 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버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지을 적당한 문장이 떠올랐는데, 핵심 개념어가 영단어로 표현해야 더 맛깔난 문장이 된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또 고민이다.

어쨌든 나는  2개 언어 멍청이(bi-illingual)가 아니라 2개 언어 구사자(bilingual)가 되고 싶다.


또 한번. 호주에 와서 만나는 나의 실체에 대해.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3. 17:27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누구나 그렇듯 가끔씩 침울한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슬럼프라고 부르는 장기간 침체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항상 '나'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풀리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호주에 오기 전까지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대체로 모두 이루었다. 긴 글이 되겠지만 이렇게 쭉 정리해서 쓰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딴짓을 아예 안한건 아니었다. 그래도 수험기간 내내 피씨방, 플스방, 영화관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동아리 후배들과의 모임때문에 노래방에만 딱 두번 갔던걸 제외하면 딱히 뭘 하면서 놀아본 기억은 없다. 타고난 머리가 남들만큼 못해서, 그리고 조금 부족한 꼼꼼함 때문에 원하던 고려대학교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성균관대에 입학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난 우리학교를 사랑한다.

수능 이후 주어진 자유시간. 누구나 그렇겠지만 핑크빛 캠퍼스 생활을 꿈꾸었던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싶을 정도로 독하게 했다. 매 끼니를 아주 적은 양의 밥과 두부, 야채로만 채웠고 열심히 운동을 했다. 두달이 지나자 16kg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다이어트도 성공.

대학 신입생의 첫 여름방학,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처음 선보였던 내일로 티켓을 이용해 일주일간 우리나라 여행을 했다. 8월 24일까지 마지막 과외수업을 하고 26일엔 그 해 카투사 지원을 위한 토익을 보고 27일 집을 떠났다. 글을 쓰다보니 새벽 5시 50분쯤 집에서 출발할 당시가 떠오른다.. 아무튼 광명시에서 출발해 땅끝마을 해남부터 임진각까지 내 나름의 전국여행을 했다.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감으로 충만했을 그때 토익점수가 나왔다. 가채점 결과와 거의 같았다. 875점. 처음 본 시험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와준 결과에 기분이 정말 좋았다.

1학년 2학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계열 입학생이었던 나는 좋은 전공 진입을 위해 좋은 학점이 필요했지만 1학기 성적이 영 별로였다. 약간의 꼼수를 부렸고, 전공 진입시 계산되지 않는 과목은 포기한채 필요한 과목만 공부를 했다. 이번에도 성공. 영어영문학과에 진입할수 있었다.
2학년. 전공을 배정받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능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특수한 환경 덕분에(때문에?) 과 학생회 대표일을 맡았다. 그릇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능력, 동시에 쓸데없이 컸던 꿈 때문에 1년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항상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고, 좋은 친구들
과 선배들을 만날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날 괴롭히던 어깨탈골.. 결국 재검을 통해 4급판정을 받았다. 2009년 겨울 장애학생보조 공익근무를 시작했다. 2년간 우리 아이들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장애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하면 우리 아이들 생각에 아직도 눈물을 흘릴때가 있다. 근무기간동안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24개월동안 200권에 조금 못 미치는 책을 읽었다. 함량미달인 책도 많았고, 채 100쪽도 되지 않는 지식총서류도 다수 끼어있지만, 그전까지 1년에 단행본 한 두권 읽을까 말까 하던 나이기에 대단한 성과였다. 영어공부도 놓지 않았다. 삶이 쳐진다고 느껴지던 시절 토익에 응시했다. 무료하고 축 쳐지는 일상을 탈출하고자 응시한 시험. 950점.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역이 난 하면 된다니까'.

어느순간부터 소집해제 후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에 이어 결정한 호주 워킹홀리데이. 현지에서 일을 구할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응시한 아이엘츠 제네럴. 결과는 밴드 스코어 7.0이었다. 

고등하교 3학년때부터 한국 나이 23살이 될때까지 난 저렇게 살아왔다. 뭐든지 정말 마음먹고 도전한 일엔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 다만 한가지 계속해서 실패했던건, 대학교 2학년 이후에 시도했던 다이어트들... 그러나 운동은 나랑 안맞는가보다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인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자신을 '고급인력'이며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주에 도착한지 두달 반이 지났다. 여기 와서 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있다.

나는 사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딱히 할줄 아는 요리도 없었다. 공익근무기간동안 우리 아이들과 매주 요리교실에 참여하긴 했었지만, 요리 과정을 제대로 눈여겨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집을 나와 살려면 먹을것도 알아서 해야하는 법인데, 요리를 못하니.. 매일 먹는게 거기서 거기다.

돈을 번다는 행위, 즉 노동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몰랐다. 한국에 있을때 과외만으로 돈을 벌어봤기에 몸을 움직여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내는게 이렇게 힘든 것인줄 몰랐다.

내세울게 없어졌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특수한 '학벌'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쨌든 존재하고 있는 대학 서열에서 1등은 아닐지언정 어딜 가도 뒤지지 않을 간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렇게도 싫어하던 학벌이 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내가 나를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큰 요인이었다. 학교 이름을 빼자 난 여기서 내세울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졌다. 그렇다고 일을 잘하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펜을 굴리고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이었다. 몸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해본적이 없는데 잘할리가.... 군대 안갔다와서 그런거라고 누군가가 말할 것 같다. 맞다. 군대 안갔다온 놈이라서 그렇다.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시간.. 일하는 식당이 있긴 하지만 매일매일 눈치만 본다. 미운오리새끼가 된 기분이다. 


식당에서 매일 인도 직원들에게 무시당하면서, 반사적으로 '나도 한국가면 고급인력이다 씨발'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외치고 돌아서면 씁쓸하다. 아 난 정말이지 제대로 할줄 아는게 없구나.....

오늘도 약자의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기 와서 깨달은 또 하나.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5. 29. 22:56
난 그동안 한국에서 당위의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현실은 현실의 세계이고, 당위는 현실과 다르다.

왜 약자가 뭉쳐서 강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지 느끼다. 법이고 뭐고 일단 일을 할수있다는거 자체가 감사.

상대방을 이기려는 경쟁심. 닐리마 덕분에 내 입지가 더 좁아지고 난 불만이 쌓여간다.

조pd의 비밀일기 가사가 떠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