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는 손

자유게시판2013. 3. 28. 05:03

나이를 먹어가며 공부를 조금씩 조금씩 많이 하다보니.. 공부할 때는 연필만한게 없다는걸 여러번 느끼게 됩니다. 물론 펜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색이 필요하거나, 정보를 시각적으로 조직할때는 펜이 적절하지요. 그러나, 차분히 앉아서 공부하는 순간에는 깔끔하게 다듬어진 연필이야말로 저와 가장 잘 맞는 필기구입니다. 특히 전공인 영문과 특성상 해외에서 발행된 페이퍼백 소설을 자주 보는데요, 그러한 책들에 쓰인 종이는 연필과 궁합이 딱 맞아떨어집니다. 볼펜이 남겨놓은 흔적이 종이에 남겨진 상처같다면, 연필이 남긴 흔적은 책이 저와 함께한 나이테와 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 덴마크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출국 전에 짐을 싸면서, 그렇게나 자주 쓰는 전동 연필깎이를 가져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칼로 깎을수도 있는 연필인데, 굳이 전동 연필깎이를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휴대용 연필깎이를 살 수도 있지만, 칼로 깎으면 된다는 생각에 결국 그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덴마크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연필 끝이 무뎌졌습니다. 연필을 깎으려 휴지 한 장을 펼치고, 칼과 연필을 양 손에 잡아보니... 문득 손으로 연필을 깎아본게 언제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더군요. 초등학생 시절의 어느 장면이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입니다. 아무튼 연필을 깎아야지요. 그런데... 손재주가 어설픈 제가 연필을 깎아보니, 초등학생이 깎아도 이것보다는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대용 연필깎이를 하나 살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습니다만, 이렇게나 어설픈 제 손재주를 보고 있자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동안 칼로 연필을 깎는 손재주를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이곳에 도착한지 딱 두 달이 지났습니다. 연필을 깎는 솜씨도 많이 늘었지요. 아직 사진을 찍어 올릴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처음 칼을 쥐어 깎았던 그날에 비하면 정말 많이 나아졌습니다. 제 손을 거쳐 깔끔해진 연필을 바라보다가, 문득 뜬구름 잡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건 '제 손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계 혹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저의 손을 통해 무언가가 모습을 달리하게 된 상황이라는... 황당한 생각 말입니다. 


나름 스무 해 넘게 필기구를 잡아오면서, 저는 그것들을 한 번도 제 손으로 직접 다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주 어릴땐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연필을 깎아주셨을테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자동 연필깎이를 사용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샤프와 하이테크 볼펜을 사용했고, 그 후에는 전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왔지요. 집을 떠나고 무언가 결핍이 생겨서야, 저는 제 손으로 연필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직접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어디 연필뿐이겠습니까? 집을 떠나 발생한 또다른 결핍, 부모님의 부재는 저로 하여금 스스로 요리를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부모님과 지낼 때 편하게 해결되던 세 끼 식사는, 이제 하루중 가장 성가시면서도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손수 만드는 요리는 연필 깎기와는 비교가 무의미할 만큼 제가 '직접' 하는 일이지요. 물론 직접 식재료를 재배하는 농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내 손으로 하는 일이, 내가 '직접' 할줄 아는 일이 많지 않은가 고민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결론이 쉽게 나왔습니다. '서비스'라는 개념 덕분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용역' 이지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그것입니다. 재화와 용역. 구매 가능한 물건과 구매 가능한 행위들은, 그러한 물건과 행위에 얽힌 행동을 우리로 하여금 직접 하지 않도록 유도하는가 봅니다. 구매 가능한 연필깎이는, 칼로 연필을 깎는 행위를 대체합니다. 요리의 경우 부모님의 예는 적절해보이지 않네요. 구매 가능한 요리는 무엇일까요? 어려울것 없습니다. 음식점이 바로 요리를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참 음식점이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 학생들 가운데 자취생을 뺀다면 직접 요리를 할 줄 아는 학생은 참 드물지요. 그런데, 조금이나마 다녀본 서구권 몇몇 나라들엔 길가 음식점이 너무 없습니다. 다니다 보면 불편할 지경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원인으로 작용해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만들어내는것 같습니다. 제가 만나본 서양인 학생들은.. 20대 초반이지만 왠만하면 조금씩이나마 요리들을 합니다.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지요.


누군가는 제 이야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칼도 결국 공산품 아니냐고,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것도 결국 구매 행위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은 없습니다^^ 세상이 세상이니만큼,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직접 삶을 꾸려나가자! 이런 주장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요.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그렇게 파격적이거나 고색 창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넘쳐나는 재화와 용역의 세상에서 잠시 한 박자 쉬면서, 무언가를 우리 손으로 직접 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돈은 딱 그만큼의 자유만을 우리에게 허락하는것 같습니다. 구매의 자유. 구매의 자유만 즐기다보면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내는 자유는 점점 외연을 좁혀갑니다. 맛있는 요리도 할 수 없고, 연필 끝이 무뎌졌을 때 연필심을 날카롭게 하지도 못하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구매의 자유 아래로 종속되어가는 삶의 자유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불편하게 바라보는 분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돈이 우리 삶에 개입하는 현상은 날이 갈수록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갑니다. 일례로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다루어지는 소재들은, 사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즉, 그러한 사건의 발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돈으로 거래될 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안타깝게도, 구매의 대상은 시간이 갈수록 다양해져만 갑니다. 마이클 샌델이 한국에 왔을 당시 열렸던 무료 강연조차 암표가 거래되었다고 하지요... 상황이 이렇더라도, 저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실제 삶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나자는 이야기를요. 실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경험은 결국 손과 발을 거쳐서, 감각을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구매의 자유 아래로 자꾸만 숨어들어가는 우리 생활의 자유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보는건 어떨까요? 저는 앞으로 평생 연필을 제 손으로 깎을 결심을 했답니다. 우리나라에 계신 여러분들은.. 곧 다가올 벚꽃을 상쾌한 마음으로 만나러 가는건 어떨까요? 번거롭겠지만 도시락을 직접 싸보기도 하고,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인터넷 글 치고는 장문의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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