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13. 16:45

나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다. 대체로 정이 많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만 때때로 모질게 이기적이고, 대체로 양심을 따르며 규칙을 준수하려 하지만 때때로 정해진 것들을 거부하며 파괴적인 방향을 지향하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쨌든 이상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이상한 점이 많으면서 동시에 생각도 많은 나에게 영어는 참 성가신 존재다. 어릴때부터 좋아했기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 덕분에 한국에서만 공부한 학생 치고는 괜찮은 영어를 구사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네 영역 모두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런데 영어의 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땅에서 영어가 일상생활에 얼마나 스며들고 있는지를 발견할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우리말을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쯤 영어와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논리적인 흐름이나 어투가 조금 어색하고 조잡해 부끄러운 글이다. 짧은 글은 아니지만 여기에 붙여보겠다.

 
저 글을 쓸 당시보다 지금은 약간 입장이 유연해진 편이다. 언어의 역사를 아주 잘 알고있는것은 아니지만, 천 년 넘게 라틴어가 유럽의 사상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떤 언어가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 후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회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영어가 이렇게 절대적 힘을 유지하는것도 언젠가 끝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게 바로 조금씩 주관을 잃고 세상과 타협해가는 사고의 흐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하기도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나름 부딪치며 살아가다보니 점점 이렇게 변해가는 나를 부정할수 없다.

어쨌든 영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나조차도 호주에서 영어로 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사고방식을 엮어가는 통로에 영어가 자주 끼어들고 있다는걸 느끼고 있다.

자동차 클리너 판매 일을 하던 시절, smog라는 단어를 하루종일 말해야만 했었다. '이 제품으로 화장실 유리를 닦으시면 성에가 끼지 않습니다' 라는 내용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집에 돌아와 같이 사는 형들에게 그걸 설명하는데, smog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하는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고, 잠깐 고민하다가 내뱉은 말이 '안개'라는 단어였다. 화장실 유리에 안개라니.. 

영어가 내 사고의 흐름에 파고들고 있다는걸 처절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친구가 생일이라 생일 축하 전화를 했다. 나는 장난삼아 그 친구가 전화를 받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는 몇 마디를 영어로 쏟아부었다.

장난삼아 한 행동이긴 했는데, 대체 왜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 내가 대체 왜 그런거지?'

한국인 형들과 살면서 영어가 일상 언어로 자리잡지 않았지만, 일하는 환경에서는 어쨌든 영어를 쓰고 있는 나. 호주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영어가 귀와 입에 익숙해지는걸 느낀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영어가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영어가 나를 지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면 참 이상하다.

난 분명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영어를 섞어서 쓰는 사람을 무지 싫어했었는데..
순 우리말 개념어를 더 힘있게 보강해서 우리가 홀로 학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에 나는 오늘도 조금씩 빗장을 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버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지을 적당한 문장이 떠올랐는데, 핵심 개념어가 영단어로 표현해야 더 맛깔난 문장이 된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또 고민이다.

어쨌든 나는  2개 언어 멍청이(bi-illingual)가 아니라 2개 언어 구사자(bilingual)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