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토익 만점 수기』넌 토익 몇점이니?

독서기록2012. 2. 17. 00:43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심재천이라는 신인 작가를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하다.


촌스러울 정도로 노란 표지와 엉성하게 그려놓은 인물들에 시선이 꽂혔다. 난 원래 병맛을 즐기니까.

평소 소설도 잘 안 읽는데다가 신인 작가들의 새로운 소설을 더더욱 읽지 않는 나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책날개를 살짝 펼쳐보았다. 어라!?


토익 590점을 맞은 '나'는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 속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호주!!! 2011년의 7개월을 호주 멜번에서 보낸 나로서는 표지뿐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가지기 충분했다. 아쉽게도 작품 속 '나'는 멜번이 아니라 브리즈번으로 날아갔다. 

아무렴 어때, 간만에 소설 한 권 읽어보자.


다 읽어보고 나니, 심사위원평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너무 잘 읽혀서  오히려 걱정될 정도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탁월하다. 가벼운듯하지만 주제의 깊이가 범상치 않고, 반전이 주는 문학적 상상력도 대단했다.'


『7년의 밤』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정유정 작가가 전작인 『내 심장을 쏴라』를 발표했을때, 『나의 토익 만점 수기』를 접했듯 우연한 기회로 출판되자마자 읽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작품을 읽고 나서 '거의' 신인이었던 정유정 작가를 주목했었는데, 『나의 토익만점 수기』를 읽고는 심재천 작가야말로 더 주목해야하는 작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 시즌이 완전히 끝난 올해 봄. 나는 서류전형 한 번 통과해보지 못하고 시즌을 접었다. '지원자격:토익 800점 이상'이라는 문구 앞에서 나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넌 꺼져."

참 웃기다. 그런데 슬프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로 표현해보자면, '웃프다.' 세상에 어느 주류 소설작가가 이런식으로 작품을 이끌어가는가? 나는 이 대목에서 '잉여력'과 '문학성' 을 감각적으로 오가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가의 감각을 느꼈다. 자꾸 정유정 작가를 언급해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짧은 호흡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박력과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힘이 뛰어나지만, '병맛'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병맛'을 첨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고, 그게 우리가 웃는 방식이며, 때로는 그게 우리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병맛'을 발산하는데는 또한 '잉여력'도 필요하다. 잉여력은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비교적 '쓸데없는 것'들에 몰두하는 에너지다. 예를 들면 요즘 유행하는 작은 하마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확대-재생산되는지를 검색해보라.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은 절대 이해못할 현상이다.(바로가기1:원작 바로가기2:최초번역 바로가기3:패러디 시작 바로가기4:심화발전

본문 맨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심재천 작가는 3년간 무직자 신세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사람, 분명 잉여짓도 해봤고 병맛이 뭔지도 아는 사람일거라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다.

오늘 아침 스티브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 (...) 처음엔 땅속에서 외계인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땅이 스스로 열렸고, 생명체의 머리가 올라왔다. 머리, 가슴, 몸통, 다리 순으로 기어 올라왔다. (...) 몸엔 흰색 방사능 재킷을 둘렀다. 우주 괴물이 따로 없었다. 두 발엔 삼색 아디다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인간일나느 것을 알았다. 외계인이라 믿기엔, 아디다스 슬리퍼가 너무 인간적이었다.

이게 대체 뭔가.. 이거 글로 써있으니 소설이지 약간의 상상력만 더해 만화로 그려놓으면 전형적인 b급 병맛 웹툰의 한 장면이다. 난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장면을 묘사한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작품이 내내 이런식으로 실없는 소리와 어이없는 장면 묘사로만 가득찼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셈이 된다.

바나나 농장을 가장한 마리화나 농장에서 스티브와 함께 일하며 주인공 '나'는 매일매일 영어실력 향상에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짧은 생각일지라도 영어로 반드시 말해보는 습관은 그 노력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도대체 이 모기들은 뭣 때문에 있는 건가." 나는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what are these mosquitoes for?"라는 문장이 뒤따랐다. 여덟 살짜리의 문장이다. '모기가 뭣 때문에 있냐?"니,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유치하다면 유치한 질문이다. 영어로 사고하면 이 점이 쓸 만하다. 천진무구한 질문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어린애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머릿속에 낀 때의 오물이 벗겨지는 것이다. (...) 신축 아파트를 보면 "분양가는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물고기를 보면 "회쳐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소와 돼지를 보면 스테이크나 햄버거를 떠올린다. 데이트 중인 커플을 보면 "같이 잤군"하며 이상한 상상을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109쪽)

그녀는 한국어 학습노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통나무집을 나선다. (...) 요코는 "왜 쌍니은 없어?", "쌍리을은?, 쌍이응은?"하며 파고들었다. 대답하기 곤란했다. 쌍니은, 쌍리을이 왜 없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어왔을 뿐이다. (117쪽)


얼핏 보면 철없이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인이 내뱉은 공상에 불과한 109쪽 독백은 117쪽의 독백과 연결되는 순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한국어로 말을 하는 동안은 순수한 생각이 불가능하기에 영어로 사고하면 그런 점에서 쓸 만하다고 말했던 '나'는 한국어 선생의 입장에서 또다시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속절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지막 한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어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어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지식들은 어떨까.,? 



머릿속엔 온통 '805'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루에 세 번 했다. 그래도 '805'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정도면 고득점 아닌가." 스티브가 말한다. "한쪽 눈이 없는 것과 같아. 805점이란 점수는." "그럴 리가," "한국에선 그래." (162쪽)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208쪽)


좋든 싫든 나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 더욱이 곡절 끝에 토익(...) 이 점수를 가지고 왜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단 말인가.

(270쪽)


뭐라 부연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작가가 얼마나 현실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절정을 향해 치달았을 때, 영어에 대한 강박은 잠시 잊혀지지만 모든 것이 해소된 후, 강박은 은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토익 점수가 있기에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나'. 그리고 그러한 '나'가 기업 면접을 보고 나오며 만나는 꼬마.


나는 손에 쥐어진 물체를 본다. 꼬마펭귄 뽀로로 왕사탕이다. (...) "주워주셔서 고맙다고 해야지." 은행에서 나온 아이의 엄마가 말한다. (...) 이 아이의 미래는 밝다고, 나는 생각했다. (277쪽)


모두 꼭 읽어보기실 바란다. 영어에 대한 강박이 토익 점수와 함께 해소되는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페이지에서 영어에 대한 강박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마지막으로, 워낙 이야기 전개와 맞물리는 부분이라 여기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눈'과 관련된 표현을 조금 신경써서 읽는다면 분명 책장을 덮었을 때 생각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으면서도 소설이, 혹은 문학이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 책이었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으로 기뻐하는지를 피부로 느끼는 작가가 우리 시대의 감성과 우리 시대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은 수작이다. 앞으로 심재천 작가님의 행보에 주목할 것을 나에게 약속하고, 또 여러분들에게 부탁한다.



읽은 기간 : 2012년 2월 초

정리 날짜 : 2012년 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