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자본주의를 탐구하다 문득 나를 돌아보다.

독서기록2013. 2. 21. 03:48

2010년 8월 22일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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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닌 서평을 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항상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압박감 때문에 천천히 서평을 써 볼 여유 있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때문에 이렇게 서평을 써보려고 한다. 

자본주의. 정확히 어디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라났으며,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이 괴물. 누구나 이 괴물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 상처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들과 반대로, (속물적 근성에서 오는)우월감이나 우쭐함을 느껴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당장 나를 돌아보더라도, 어린 시절 돈과 관련된 안타까운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함께 네 살 아래 여동생의 물건을 사러 문방구에 간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생의 선물을 사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당시 나는 아주 큰 박스에 담긴 장난감을 갖고 싶었고, 엄마는 그런 나의 손짓을 매우 미안해하고 또 난처해하는 표정과 함께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나의 내면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 잡았을까?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론 지금은 부모님 명의로 된 아파트에 네 식구 가족이 잘 살고 있기에 그 어려웠던 시절은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훨씬 전에,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내가 세 살 꼬맹이였을 때 옆집 아주머니께서 과자라도 사먹으라고 천 원짜리를 주신 적이 있는데, 세 살의 나는 그 천원을 ‘버렸다.’  

손 안에 들어온 ‘돈을 버린’ 나의 내면과 엄마가 나에게 장난감을 사주시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집에 돈이 많지 않아서’라는 점을 알고 있던 나의 내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돈을 버린 나에게는 화폐, 혹은 돈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였지만, 돈이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나에게 돈이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이 이럴진대,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기억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을까?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상처받으며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장에서 이상과 짐멜을 통해 돈이 어떻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지부터 시작하는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20년대 모던보이 이상의 적나라한 내면의 실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솔직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이 드러났는데 그 드러난 부분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리고 그 불쌍한 부분이 너무나도 나와 같아서 처음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날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쫓던 ‘모던함’은 결국 ‘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보다. 돈이 왜 없냐면서.(65쪽)

책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3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용돈은 한 달 3만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돈이 매달3만원이긴 했지만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고, 또 내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은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방구의 기억 때문인지, 난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요구는 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들 중에서도 무리한 요구가 있었기에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한 달 3만원으로 지내던 나였는데, 대학교에 가보니 한 달 3만원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던 나는 입학 전부터 친척 어른들에게서 받은 상당한 용돈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부모님이 난생 처음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나에게 한 학기동안 잘 써보라고 통장에 넣어주셨다. 그런데 ‘돈 쓰는 맛’을 난생 처음 알게 된 나에겐 지출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대략 120만원을 단 두 달 만에 다 써버렸다. 기억에 남는 지출도 없다. 그저 놀러 다니고, 밥 먹고, 술 마시는 데만 그렇게 돈이 새나갔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 속 허무함은 커져만 갔고, 결국 잔고가 만 원 대로 내려앉는 순간 마음 속 허무함은 육체적 무기력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날개』의 주인공(=이상)이 돈의 가치를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느끼는 ‘돈이 없다’라는 느낌을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느꼈던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들은 결코 지금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공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여러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 

두 번째 장의 보들레르와 벤야민 부분은 패션의 에로티시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141쪽)

우리는 왜 계속해서 옷을 살까? 분명 옷장에는 지금 당장 입고 나갈 수 있는 옷들이 몇 벌 있지만, 옷장 앞에 서면 항상 뭘 입을까 고민되고, 집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옷을 관찰하고 또 옷가게 앞을 지나가면 한 두번씩 슬쩍 쳐다보게 된다.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위의 견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얘기야 지금까지 나도 생각해봤던 점이었지만, 세 번째 주장은 꽤 신선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에로티시즘이라고 해서 반드시 섹스를 이루어내기 위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경우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외출할 때, 누구를 만나러 갈지에 따라 의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성끼리 만나는 경우와 이성을 같이 만날 경우의 옷차림이 다를 것이고, 동성끼리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가는 목적지가 어딘지에 따라 옷차림이 또 달라질 것이다. 이 점을 왜 지금까지 패션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에 포함시키지 못했을까? 앞으로 옷을 사고싶은 욕망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항상 세 번째 이유를 빼먹지 말아야겠다.

세 번째 장에서는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두 명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키워드는 바로 ‘허영’.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287쪽)

위 인용문은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의 다른 책들을 전에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위 인용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내 내면의 허영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것일까. 순수하게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주변 친구들과 나 자신을 ‘구별짓기’하고 싶은 욕망을 눈감을 수가 없다.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를 읽는 친구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는 내 모습은 절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 같다. 어제 밤에도 친구와 책에 관한 얘기를 하는데 친구가 스피치에 관한 어떤 책을 추천했고, 나는 실용서는 보지 않는다고 말하며 친구의 추천을 거절했다. 독서에 대한 나의 취향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외를 꾸준히 하면서, 부유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모자르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있는 내가 왜 자꾸만 돈 문제를 가지고 내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하는 걸까. 모두 나의 내면 속 허영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 같다. 슬프다. 갑자기 글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이런게 저자가 말했던 불편함일까.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었지만, 자본주의는 물론 나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던 책이다. 이제 그만 써야겠다. 


영어를 소재로 우리 근현대사를 따라가보자.

독서기록2012. 8. 13. 22:39

 


영어 조선을 깨우다. 1

저자
김영철 지음
출판사
일리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영어 조선을 깨우다』제1권. 한반도에 영어가 언제 어떻게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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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자체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한국 내에서 영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와 영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상념은 깊이 들어갈수록 매력적인 분야이다. 내 전공이 영어영문학이기에 첫 번째 관심은 당연하고,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영어학원 광고들을 보고 있노라면 두 번째 관심사도 자연스레 따라나온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부터 시작된 나의 '영어 비판' 독서 흐름상, 이 책은 발견하자마자 꼭 읽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돈과 시간 문제, 그리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에 알게 된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구매해서 읽었다.

 

나의 착각과는 달리 이 책에는 영어에 대한 별다른 '의견'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의 병리적 기능에 집중해 독서를 해온 탓에, 나는 이번에도 그러한 내용을 기대했었다. 읽다보니 그게 아니었다.『영어, 조선을 깨우다』는 건조한 사실들과 최소한의 해석이 가미된 역사서이다.

 

1. 초반부의 지루함을 조금만 견뎌내면 대체로 속도감 있는 전개가 이어진다. 재미를 부가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곁들여지며 책은 18세기 후반의 조선에서부터 19세기 후반 자주독립을 꿈꾸며 유학생을 파견하고 외국어교육을 실시하는 조선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홀의 항해기에는, 리라 호에 이어 알세스트 호에 올라 문정하던 첨사 조대복 일행에게, 맥스웰 함장이 스스로 "I do not understand one word that you say."라는 말을 종이에 써 정중하게 전해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47쪽)

보빙사 일행은 쇼핑도 했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미국에서 맞은 민영익은 백화점에서 가죽장갑을 구입해 끼고 아주 만족해했다고 전한다. 또 유길준은 한복을 벗어버리고 양복을 사 입기도 했다.(268쪽)

 

2. 그러나 위와 같은 '흥미로운' 일화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 말기 지배층의 바깥 세상에 대한 무지를 보고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말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식민지화는 우리 자신의 무지의 탓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지배 역사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든,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당시 조선 조정의 무지와 무능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 연안에 이양선의 출몰이 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조선은 그들과의 대화를 위한 방법을 강구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 이는 1832년 영국의 암허스트호가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한자를 구사하는 구츨라프를 통역사로 태우고 나타난 지 30년도 넘은 시점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이나 소통을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125~126쪽)

 

청나라가 자신들에게 알아서 찾아오는 서양인들과 교류하고, 일본인들이 제한적이나마 계속해서 서양 세계와 접촉하고 있을 때, 조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문명권과 서양 문명권의 사상과 기술력 수준차는 논외로 하더라도, 주변국이 모두 교류의 상대로 보는 서양인들을 그저 오랑캐,도깨비로만 생각해 아무런 건설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았던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너무 안타깝고 또 한심하다.

 

3. 안타깝고 한심한 사람들이 아닌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성장을 지켜보는것은 역사를 읽으며 느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알고있을때, 그들의 성장 과정은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윤치호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최고의 엘리트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윤치호는 열성적으로 공부했고, 그의 발자취가 세세하게 소개되어있다.

 

윤치호는 중서서원의 1885년 봄 학기에 영어독본과 영문법 지리 수학 물리학 등 다섯 과목을 수강했다. (...) 그러다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다. (...) 미국 유학기간동안 윤치호는 『워렌 헤이스팅의 인도정책』『영국사』『로마제국 흥망사』『19세기 인도제국』, 셰익스피어, 잉거솔, 호손, 테니슨, 포, 위고, 칼라일, 에머슨의 작품을 읽었다 

조선에서 한학을, 중국에서 서양 학문의 기초를, 미국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마치고 중국 중서학원의 영어 교수가 되기까지 윤치호는 최고의 지적 기량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일제에 굴복했고, 친일 지식인으로 일제시대를 살아가다 해방 후 친일파로 비난받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자결했다. 이와같은 사실만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어린 윤치호가 서양의 말과 학문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육영공원 출신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라고 지칭되는 이완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을사오적의 이미지때문에 윤치호에게서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느껴지긴 했지만..

 

4.마지막으로, 망국의 군주 고종에 대한 연민을 느낄수 있었다. 아버지가 물러난 후 고종이 개혁과 자주독립을 꿈꾸며 단행했던 개혁들은 보수 세력의 반발과 해외 열강의 비우호적 태도와 무관심에 떠밀려 허사가 되기 일쑤였다. 특히 안타까웠던 점은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미국을 믿었던 고종의 순진함이자 무지함이다.

 

미국을 '공평무사한 나라'로 인식하고, 조미조약 속의 '거중조정'을 굳게 믿은 고종(...)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 미국은 조선에 진출한 주요 국가 가운데 한양 이외 지역에 영사관을 설치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다. (...) 워싱턴 당국이 조선에 관해 갖고 있던 근본 태도는 기본적으로 '무관심(indifference)'였다. 이것이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의 외교적 수사를 통해 전달됐을 때, 조선 조정은 그것을 '공평무사'로 해석했다. (359쪽)

위와 같은 감정들을 느끼며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그런데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들이 아니었다. 글을 읽는 중간중간, 저자가 정말 기자는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성한 문장들이 몰입을 방해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한양의 명례방에 살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를 함께 공부하다 형조에 적발된 사건이다. (86쪽)

 

영선사 일행은 9월 26일 출발, 10월 26일 압록강을 건너, 11월 17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 기록들은 모두 음력이기 때문에,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북풍을 온 몸으로 맞으며 신문물을 배우려고 고난의 행군을 강행했다. (179쪽)

 

 

서술어의 실제 주어가 생략돼있고, 주격 조사 '~은'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문두에 자리하고있어 읽는 데 혼란스러웠다. 문맥상 누가 적발되었는지, 누가 강행했는지 파악할수야 있지만, 읽는 순간 맥이 빠지는 문장들이었다. 기자가 쓴 글인지 의심스러워지는 부분.

 

다음으로는 동일 인물의 '바뀐 이름'을 아무 설명 없이 다른 페이지에 쓰는 경우다.

1년 뒤 민주호는 윤정식과 함께 다시 상하이로 윤치호를 찾아간다. (...) 이들은 민영익에게 접근해 함께 생활하다, 민영익이 은행에 맡긴 조선 조정의 홍삼대금을 몰래 인출해 일본으로 달아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232쪽)

민상호와 윤정식은 잠시 귀국했다가 1885년에 다시 상하이로 가 윤치호의 주선으로 중서서원에 다녔다. 그러다 민영익 이름으로 프랑스 은행에 예치돼 있던 홍상 판매대금 1만 7288달러를 몰래 빼내(...) (294쪽)

홍삼대금을 몰래 빼낸 청년은 민주호가 맞다. 그러나 민주호는 나중에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설득으로 귀국한 후, 도둑의 오명을 씻기 위해 이름을 민상호로 바꾸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60페이지 후 민주호의 바뀐 이름 민상호를 제시하고 있다. 기자가 쓴 책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였다. 

그 외에도 시간의 흐름이 다소 뒤죽박죽인 부분도 있고, 표현이 어색한 부분도 더러 발견되었다.

 

글의 후반부에 표현 차원에서 다소 날선 비판을 했지만, 글쓴이는 분명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훌륭한 작업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영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앞으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만한 책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읽은 기간 2012년 7월 중순 ~ 8월 12일

정리 날짜 2012년 8월 13일

 

결국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독서기록2012. 7. 19. 01:53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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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마만에 쓰는 독서 리뷰인가.. 마지막으로 쓴 게 심재천씨의 『나의 토익 만점 수기』리뷰이고 무려 2월 17일에 쓴 글이다. 3월에 접어들면서 학교 생활을 하느라 너무 바빴다. 3년만에 돌아간 학교는 날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고, 나도 나름대로 학교 밖 생활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느라 바빴다. 그런 와중에 역시 가장 먼저 줄어든 시간은 독서시간이었다. 학기 내내 틈틈히 책을 읽긴 했지만, 정리해서 리뷰를 쓰지는 못했다. 이제 방학하고 거의 한 달이나 지나간 시점에서 드디어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마이클 샌델의 저작은 두 번째로 읽는다. 전작『정의란 무엇인가』를 2011년 1월에 읽었으니 꼭 1년 반만에 다시 샌델을 만났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 이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전작의 초반부에서 다루었던 문제를 확장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 작품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이후 다양한 저작들이 우리나라에 번역,소개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사실상 『정의란 무엇인가』를 전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해 보인다.


샌델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들은 이미 다른 매체나 리뷰어들의 글에서 언급되었기에 내가 또다시 언급해 인터넷 공간에 불필요한 문장을 더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끝까지 읽은 결과, 샌델의 가장 주효한 뒷받침 명제는 결국 '시장은 단순한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규범을 나타낸다.' 이 문장에 집약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매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교환에서 그치지 않고, 거래되는 대상의 규범, 가치, 존재 방식 등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다. 


우선 샌델이 제시하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 시장은 비시장의 영역이었던 것들을 대부분 '부정적' 방향으로 영향을 준다. 이스라엘 어린이집 이야기는 시장 규범이 어떻게 '미안함'과 '책임감'을 밀어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는 우리도 늘상 겪는 경우라 생각한다. 해야할 일을 제 때 하지 못하고 우리는 버릇처럼 '돈'으로 그 잘못을 대신한다. 대학생들이 늘상 만드는 스터디에서는 자주 지각비 제도가 만들어진다. 서로간의 책임감이 아니라 결국 돈으로 규제를 하는 형국이다. 


시장 원리와 도덕 가치의 대결에서 시장이 도덕을 밀어내는 사례들을 쉼없이 제시하는 샌델은 책의 마지막 세 문단에서 최종적인 관심사이자 우려를 말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불평등이 점차 심화되면서 모든 것이 시장의 지배를 받는 현상은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점차 분리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고 쇼핑하며 논다. 우리 아이들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닌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스카이박스화(skyboxification)되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는 민주주의에 좋지 않으며 만족스러운 생활방식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시민에게 공동체적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배경, 사회적 위치, 태고,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며 서로 마주하고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고 이를 놓고 협상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쏟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도덕적, 시민적 재화는 존재하는가?  (275~276쪽)


이 부분을 읽으며 샌델이 그냥 철학자가 아니라 롤스 정의론을 비판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정치' 철학자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결국 샌델이 걱정하는 것은 재산에 기반한 신분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체 중심적(미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단어라고 김선욱 교수님의 해제에 설명되어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샌델에게 있어, 신분제 사회화 되어가는 미국의 모습은 사실 차분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작의 후광으로 출판 업계와 독자들 사이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번 저작은 사실 사회적 후폭풍으로만 본다면 전작에 한참 못미치는듯 하다. 그래도 포기할수는 없지 않은가?『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제시하는 미국과 여러 나라의 사례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읽은 기간 2012년 7월 8일 ~ 2012년 7월 16일

정리 날짜 2012년 7월 19일


『나의 토익 만점 수기』넌 토익 몇점이니?

독서기록2012. 2. 17. 00:43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심재천이라는 신인 작가를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하다.


촌스러울 정도로 노란 표지와 엉성하게 그려놓은 인물들에 시선이 꽂혔다. 난 원래 병맛을 즐기니까.

평소 소설도 잘 안 읽는데다가 신인 작가들의 새로운 소설을 더더욱 읽지 않는 나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책날개를 살짝 펼쳐보았다. 어라!?


토익 590점을 맞은 '나'는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 속에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호주!!! 2011년의 7개월을 호주 멜번에서 보낸 나로서는 표지뿐 아니라 내용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가지기 충분했다. 아쉽게도 작품 속 '나'는 멜번이 아니라 브리즈번으로 날아갔다. 

아무렴 어때, 간만에 소설 한 권 읽어보자.


다 읽어보고 나니, 심사위원평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너무 잘 읽혀서  오히려 걱정될 정도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탁월하다. 가벼운듯하지만 주제의 깊이가 범상치 않고, 반전이 주는 문학적 상상력도 대단했다.'


『7년의 밤』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정유정 작가가 전작인 『내 심장을 쏴라』를 발표했을때, 『나의 토익 만점 수기』를 접했듯 우연한 기회로 출판되자마자 읽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작품을 읽고 나서 '거의' 신인이었던 정유정 작가를 주목했었는데, 『나의 토익만점 수기』를 읽고는 심재천 작가야말로 더 주목해야하는 작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 시즌이 완전히 끝난 올해 봄. 나는 서류전형 한 번 통과해보지 못하고 시즌을 접었다. '지원자격:토익 800점 이상'이라는 문구 앞에서 나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넌 꺼져."

참 웃기다. 그런데 슬프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로 표현해보자면, '웃프다.' 세상에 어느 주류 소설작가가 이런식으로 작품을 이끌어가는가? 나는 이 대목에서 '잉여력'과 '문학성' 을 감각적으로 오가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가의 감각을 느꼈다. 자꾸 정유정 작가를 언급해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짧은 호흡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박력과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힘이 뛰어나지만, '병맛'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병맛'을 첨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우리가 사는 방식이고, 그게 우리가 웃는 방식이며, 때로는 그게 우리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병맛'을 발산하는데는 또한 '잉여력'도 필요하다. 잉여력은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비교적 '쓸데없는 것'들에 몰두하는 에너지다. 예를 들면 요즘 유행하는 작은 하마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확대-재생산되는지를 검색해보라.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은 절대 이해못할 현상이다.(바로가기1:원작 바로가기2:최초번역 바로가기3:패러디 시작 바로가기4:심화발전

본문 맨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심재천 작가는 3년간 무직자 신세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사람, 분명 잉여짓도 해봤고 병맛이 뭔지도 아는 사람일거라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다.

오늘 아침 스티브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 (...) 처음엔 땅속에서 외계인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땅이 스스로 열렸고, 생명체의 머리가 올라왔다. 머리, 가슴, 몸통, 다리 순으로 기어 올라왔다. (...) 몸엔 흰색 방사능 재킷을 둘렀다. 우주 괴물이 따로 없었다. 두 발엔 삼색 아디다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인간일나느 것을 알았다. 외계인이라 믿기엔, 아디다스 슬리퍼가 너무 인간적이었다.

이게 대체 뭔가.. 이거 글로 써있으니 소설이지 약간의 상상력만 더해 만화로 그려놓으면 전형적인 b급 병맛 웹툰의 한 장면이다. 난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장면을 묘사한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작품이 내내 이런식으로 실없는 소리와 어이없는 장면 묘사로만 가득찼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셈이 된다.

바나나 농장을 가장한 마리화나 농장에서 스티브와 함께 일하며 주인공 '나'는 매일매일 영어실력 향상에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짧은 생각일지라도 영어로 반드시 말해보는 습관은 그 노력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도대체 이 모기들은 뭣 때문에 있는 건가." 나는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what are these mosquitoes for?"라는 문장이 뒤따랐다. 여덟 살짜리의 문장이다. '모기가 뭣 때문에 있냐?"니,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유치하다면 유치한 질문이다. 영어로 사고하면 이 점이 쓸 만하다. 천진무구한 질문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어린애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머릿속에 낀 때의 오물이 벗겨지는 것이다. (...) 신축 아파트를 보면 "분양가는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물고기를 보면 "회쳐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소와 돼지를 보면 스테이크나 햄버거를 떠올린다. 데이트 중인 커플을 보면 "같이 잤군"하며 이상한 상상을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109쪽)

그녀는 한국어 학습노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통나무집을 나선다. (...) 요코는 "왜 쌍니은 없어?", "쌍리을은?, 쌍이응은?"하며 파고들었다. 대답하기 곤란했다. 쌍니은, 쌍리을이 왜 없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어왔을 뿐이다. (117쪽)


얼핏 보면 철없이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인이 내뱉은 공상에 불과한 109쪽 독백은 117쪽의 독백과 연결되는 순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한국어로 말을 하는 동안은 순수한 생각이 불가능하기에 영어로 사고하면 그런 점에서 쓸 만하다고 말했던 '나'는 한국어 선생의 입장에서 또다시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속절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지막 한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어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어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지식들은 어떨까.,? 



머릿속엔 온통 '805'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루에 세 번 했다. 그래도 '805'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정도면 고득점 아닌가." 스티브가 말한다. "한쪽 눈이 없는 것과 같아. 805점이란 점수는." "그럴 리가," "한국에선 그래." (162쪽)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208쪽)


좋든 싫든 나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 더욱이 곡절 끝에 토익(...) 이 점수를 가지고 왜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단 말인가.

(270쪽)


뭐라 부연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작가가 얼마나 현실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절정을 향해 치달았을 때, 영어에 대한 강박은 잠시 잊혀지지만 모든 것이 해소된 후, 강박은 은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토익 점수가 있기에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나'. 그리고 그러한 '나'가 기업 면접을 보고 나오며 만나는 꼬마.


나는 손에 쥐어진 물체를 본다. 꼬마펭귄 뽀로로 왕사탕이다. (...) "주워주셔서 고맙다고 해야지." 은행에서 나온 아이의 엄마가 말한다. (...) 이 아이의 미래는 밝다고, 나는 생각했다. (277쪽)


모두 꼭 읽어보기실 바란다. 영어에 대한 강박이 토익 점수와 함께 해소되는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페이지에서 영어에 대한 강박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마지막으로, 워낙 이야기 전개와 맞물리는 부분이라 여기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눈'과 관련된 표현을 조금 신경써서 읽는다면 분명 책장을 덮었을 때 생각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으면서도 소설이, 혹은 문학이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 책이었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으로 기뻐하는지를 피부로 느끼는 작가가 우리 시대의 감성과 우리 시대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은 수작이다. 앞으로 심재천 작가님의 행보에 주목할 것을 나에게 약속하고, 또 여러분들에게 부탁한다.



읽은 기간 : 2012년 2월 초

정리 날짜 : 2012년 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