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체성』 - 한국적인 것이란 존재하는가?

독서기록2013. 2. 21. 03:54


한국의 정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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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때도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과연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책은 위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책은 아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기반 마련을 해주는 책이다. 각 장의 제목을 살펴본다면 이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장 :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2장 :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3장 : 정체성 판단의 기준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대체 어떤 문제인지를 첫 장에서 소개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위 제목이 암시하는 방향과는 약간 다르게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부분이 핵심적인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 판단의 기준을 설명하는데,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고유성, 창의성, 주체성' 이렇게 세 가지이다.

3장에서도 마지막으로 다루어지는 주체성은 이 책의 후속작으로 봐도 무방한 『한국의 주체성』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책의 구조와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럼 각 장의 내용을 조금씩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나의 생각을 덧붙여보겠다.
 


먼저 제1장.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정체성 문제가 사실은 아주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같이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다루는 문제는 수천 년 간 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점을 간과하고 그저 '한국의 정체성'이 우리 마음대로 고민하다보면 결론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인 양 고민해왔다. 저자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와 같은 태도에 비판적인듯 하다. 
또한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합성의 오류와 분할의 오류이다. 대다수 미국의 시민들이 각각 제국주의자가 아닐지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는 분명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SK가 현재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팀일지라도(2010년 10월 3일 현재. 준플레이오프 진행중. SK는 정규리그 1위) SK 소속 선수가 모두 각 포지션에서 한국 야구 최강의 선수는 아닐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특성이 한국이라는 집단을 확인시켜주며 그것이 정말 한국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저자의 실수 혹은 혼란을 볼 수 있다.  

43쪽, 나는 한국을 다른 나라나 민족과 구별짓는 특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국의 언어인 한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각 분야가 공통으로 갖는 속성이나 성질이다. 물론 한국어도 한국이 갖는 여러 공통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한국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이제 두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자. 첫째, 언어이다. 국어야말로 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유일의 한글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글로 한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마치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신원 확인에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하는 것은 그 번호가 다른 것과는 같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뭉니다. 즉 유일성에 의한 구별 방식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유일한 표기 방식을 자랑하는 한글이 이 번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당시 영어공용어화 논쟁이 뜨거웠을 때라는 점을 배제하고서라도 한국어는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저자는 한국어로 시작한 말을 어느샌가 한글로 바꾸었고, 그 둘을 완벽하게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듯 하다. 그러나 한국어와 한글은 분명히 다른 대상이다. 입말인 한국어와 글말인 한글은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는 두 대상이다. 물론 한국어를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글말이 한글이라는 사실이야 부인해서는 안되겠지만, 다른 대상은 분명 다르게 생각해줘야 한다. 두 번째 비판사항은 더이상 한글이 한국어만을 표시하는 글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소수부족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 표기방법으로 채택하였다(관련기사 바로가기). 1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을 들이대 비판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행위이지만, 이 책이 계속해서 유효성을 유지하려면 이 부분만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제2장. 한국적인 것이 과연 세계적인 것인가? 

저자는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철수, 영희, 민수는 존재할 수 있더라도 '인간'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페이겔스의 글을 인용해 글을 전개해나간다.

60쪽, "~(앞부분 생략) 이 인간적으로 창조된 질서는, 인간 의식의 변화하는 의도적인 시스템-믿음, 소망, 생각 그리고 감정-을 반영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영원한 자연 질서와는 달리). 그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이며,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이해된다." 그는 자연과학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인문학의 보편성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용 부분이지만 저자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실제로 단어의 뜻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동시대에 같은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주는 단어의 존재는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치'란 결국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의 존재 또한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것' 다시말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세계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보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했으므로, 세계적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장은 예상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것의 정체는 '미국적인 것'이다. 

74쪽, 따라서 세계화란 미국화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세계화란 보편화라고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란 미국화라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즉 세계화란 미국화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과제는 분명해졌다.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각기 알아낸 후, 우리 안에서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특성을 찾아내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우리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미국적인 것과 어울리는 상품을 개발해 그것을 수출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모두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어서 제3장. 정체성 판단의 기준 :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는 고유성과 창의성은 한번에 다루어보자. 우리는 고유성을 생각하면서 시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이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땅에 포도라는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20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프랑스 포도주는 왜 다른 모든 지역을 제치고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는가? 이는 프랑스 지역 사람들이 포도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재배하고 또 그렇게 재배한 포도를 이용해 독자적인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원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외부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얼마나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독창적으로 가꾸었는지가 고유성 판단의 기준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를 독창적으로 고유화했는지 아니면 퇴락시켜버렸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나에겐 참 혼란스럽다. 내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한다. 

97쪽, 그럼 문화의 창조적 수용과 퇴락의 기준은 무엇인가? 위의 예를 통해 보면, 보편적 가치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로 보인다. 바둑의 경우 잡기보다는 도예가 더 높은 가치이며 보편적이다. 또한 유교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것보다는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더 높은 보편적 가치이다. 문화의 현상적 차이와 구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경험론자의 입장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나 흄의 동시대인과는 달리 희랍인들은 남색을 권했다. 흄은 이것이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리고 충실함의 원천으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남색 자체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지만, 남색의 바탕이 되는 성질들 즉 우정, 공감, 상호 애착 그릐고 충실함은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에서 존중받는 것"이다. 이런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지금까지의 관찰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때의 보편적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로 이름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정하거나 평가를 할 때 편의상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쓴다. 창조적 수용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적 수용의 기준은 인류가 지금까지 관찰해온 일반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치훈처럼 도 닦는 자세로 바둑을 두는 개별자가 존재한다. 인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억압받는 개인은 존재한다. 

2장에서 보편성을 다룰 때는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라는 표현을 하고, 이어서 보편적인 것 즉 '세계화'란 '미국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존재하지는 않지만 추상적으로 이름만 있는'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다.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2장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과 3장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것'이 서로 약간 다른 개념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분명 지금 내 생각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부분. 현재성과 대중성과 주체성이다. 

어렵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표제어 자체가 워낙 명시적이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성은 말 그대로 '지금' 한국에서 유효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의 유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 우리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 탐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반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생각해봐야 할 항목이다.대중성도 마찬가지로 명료한 개념이다. 저자는 대중문화를 절대 무시할만 한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무엇인가'이며, '시대의 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108쪽) 마지막, 주체성. 딱히 할 말이 없다. 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인데, 주체성 항목은 이 부분에서 다루기보다는 다음 책을 통해 고민해보는게 좋겠다.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한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책이다. 내 나름으로도 이 책의 형식을 흉내내어 서론부에 전반적인 조감도를, 각 부를 다룰 때도 초반에 안내사항을 게시하려고 노력해봤는데, 다시 읽어보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3장 마지막 부분에 보편적인 것을 논하는 부분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질 못해서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글을 '간단하게'쓰는 능력을 연마해야겠다. 불필요하게 긴 글이 되어버려서 혹시라도 읽으실 분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읽은 기간 2010년 9월 21일 ~ 2010년 9월 23일 

정리 2010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