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방향은 주어졌다.

독서기록2013. 2. 21. 03:57

*2011년 1월 4일 작성했던 글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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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년, 각 분야별로 베스트셀러는 나오게 마련이다. 2010년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를 꼽는다면, 5월 출판 이후부터 계속해서 화제가 되었던 책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사회과학서적이 종합 1위를 하는 현상을 보여준 '신기한' 책이다. 사람들은 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어떤 정의를 바라는 것일까?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의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하고 각각의 정의론들이 서로 싸우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행복'이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입장은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하는 공리주의 진영이다. 두 번째로 개개인의 '자유'가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은 칸트와 롤스가 대표하는 자유주의 진영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을 기반으로 사회적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는 세 번째 진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이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핵심적인 두 문장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행복, 즉 공리의 질적 차등성을 무시한 벤담의 무차별적이며 계량에만 의존하는 공리주의와, 행복(공리)들 사이의 질적 차등성을 인정하며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밀의 공리주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밀은 공리주의를 끝까지 지켜내려고 했다. 그러나 밀이 공리주의의 천박함을 옹호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였던 '질적 차등성의 인정'은, 되려 공리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는 사람 100 명을 세워놓고, 'MBC 음악중심' 방청권과 예술의전당에서 현재 공연중인 '강남심포니 2011 신년음악회' 입장권 중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은 음악중심 방청권을 받겠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욕구는 더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이나 욕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이상적 판단으로 옮겨간다. 밀은 어떻게든 공리주의의 천박함이라는 혐의를 벗기려 애썼지만, 되려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로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입장은 어떨까. 얼핏 생각해보면 칸트의 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한 데 모아서 서술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바로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칸트의 도덕법을 따르거나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도덕적 정언 명령을 따르라는 칸트의 윤리학은, '강요 없는 완벽한 자율'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에 맞닿는다. 또한 사회적 체제의 원리와 특성은 물론 신체적 특징이나 성격 등 자기 자신의 상태까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무지의 장막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롤스의 정의론은, '지금', 그리고 '여기'의 정의를 말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의 매킨타이어와 동행한다. 정부가 특정한 가치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인 교육을 '시민교육'의 차원으로 설명하는 주장을 펼친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삶에 개입해 올바른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서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 개념이 등장한다. 

  
 
(311쪽)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312쪽)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만나며 성장한다. 가장 원초적으로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당연히 부모의 경제적 배경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태어난 지역을 선택할 수도 없다. 따라서 경제와 복지, 주변 시설을 선택할 수 없다. 이렇듯 수많은 것들을 안고 태어나는 우리가, 정의관을 구축할 때 과연 전적으로 순수하게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공동체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받고 태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부정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릴 뿐이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361쪽)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다수의 행복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어버리고 인간 행위의 다양한 가치를 무시한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공리주의의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개인들의 취향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정의론은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 삶에 대한 신념 등을 포함하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무릇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 같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글을 처음 쓰면서는 간단한 감상문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전체적인 내용 요약이 되어버렸다. 내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라는 명성을 획득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정의에 관한 토론 현장으로 안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본위에 기반하는 개인주의도 확보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자들이 넘쳐난다. 공동선을 말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힘든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들의 생각 변화를 유도한다면, 공동선을 향한 정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젠가는 다수의 목소리가 될 날도 올 것이다.

 


읽은기간 : 2010 12 30 ~ 2011 01 02

1차 독후감 : 2011 01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