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 검색으로 들어오시는 분들께

2011/(2011)호주 워홀2012. 8. 6. 01:38

저는 2011년 3월 15일 멜번 툴라마린 공항에 도착할 당시 가진 돈 1200불과 한국 통장에 500만원이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9월 18일까지 워커로서의 삶을 살다가 그다음부터는 멜번 2주, 시드니 1주, 시드니 근교 배럴(Bowral) 1주, 그리고 유럽 두달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호주 땅에서 벌어들인 돈은 차후 세금환급 받은 것과 초기 캐시잡으로 벌은 돈까지 모두 합쳐 12000달러 가량 됩니다. 한달에 2000달러정도 번 셈이네요.


농장,공장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는 6개월간 한 집에서 살며 멜번 시티라이프만 '아주 조금' 알고 있습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다면 댓글이나 이메일 보내주시기 바립니다.

성공적인 워킹홀리데이?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8. 14. 21:39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성공적인' 워홀 생활을 꿈꾸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려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많이 노력했었지만,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약간이나마 부푼 꿈을 안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친구와 친해지고, 실생활에서 영어를 쓰게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실력을 늘리고,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구해 돈도 벌고 경험도 쌓고,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화려한 여행을 하고....

3월 15일 아침에 멜번의 아침을 처음으로 맞이했고 오늘이 8월 14일이니 이제 오늘만 지나가면 정말로 멜번에서 지낸지 5개월이 지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내온 모습들을 앞서 말한 '성공적인' 워홀 생활에 짜맞춰보자니 별로 맞아떨어지는 짝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친구라고 부를만한 외국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생활에서 영어를 쓰기 위해 외국인들과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가려고 했었으나 결국 초반에 영어로 통화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한국인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영어실력을 늘리진 못했구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구하고 싶었기에 처음에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지만, 말도 안되는 다단계 업체부터 시작해 한국 식당, 저녁 체육관 청소, 제가 일을 얼마나 못하는지 일깨워준 난도스, 건물 화장실 청소를 거쳤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원래 아침에 청소만 하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와, (가끔씩 바쁠때만!) 바리스타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돈은 그럭저럭 벌어서 어느새 호주 도착 후 적자였던 통장잔고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여행은 이제 계획을 짜고 있구요..

성공적인 워킹홀리데이 생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외국인 친구'와 '자연스러운 영어 늘리기'는 완벽히 실패했습니다.[각주:1]

이 글은 실패자의 입장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인터넷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워홀 '수기'를 찾아 읽고 계실겁니다. 만일 꾸준히 연재되는 수기가 있다면, 대체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워홀러들의 수기일 것입니다.

성공적인 몇몇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 뒤에,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꺼려하는 수천 수만명의 워홀러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기를 죽여서야 안되겠지만, 출발 전 유학원 설명회에서 들은 바로는 한 해 호주로 입국하는 한국인 워홀러가 '4만 명'이라고 합니다. 과장해서 그들중 절반이 세컨비자를 받는다고 친다면, 한 해에 호주 전역에 대략 6만여 명이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만 명 가운데 성공적인 몇몇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막연이 기대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호주는 영어권 국가이기에 영어는 절대적으로 '기본기'입니다. 여기 와서 영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호주는 영어를 '말하기 위해, 쓰기 위해' 오는 곳이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해봤던 그 어떤 일보다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문화주의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기고 다민족 사회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멜번[각주:2]이지만, 제가 보는 멜번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종에 따른 직업분화와 생활양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편의점 어디를 둘러봐도 백인은 일하지 않습니다. 중국인과 인도인이 일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표면적인 위생과 미화를 담당하는 '큰' 청소일은 백인이 합니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썰렁한 건물에 남아 하는 사무실, 화장실 청소는 유럽계, 남미계 이민자들과 동양인들이 합니다. 동양인들도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에는 동양인도 일합니다. 백인들만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에는 대체로 백인들만 일합니다. 어둠이 내리깔린 도시의 표면은 더욱더 갈라집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그들의 'Dinner'를 즐기는 자들은 백인들입니다. 자국민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 혹은 패스트푸드, 누구나 갈 수 있는 스타벅스에는 인도인과 동양인들이 넘쳐납니다. [각주:3]

이 곳에 오면 저절로 일자리가 생기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혹시 일자리를 얻게 된다면, 처음엔 좋지 않은 근무조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처음부터 모든게 잘 풀리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나라이며, 이곳의 규칙과 분위기를 모르는 초보 구직자에게 좋은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힘들게 생활하실 것을 무조건 각오하시고 오셔야 합니다.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 '누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성적을 올렸다'라는 말만 듣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다음 시험에서 별 재미를 못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어 하나만큼은 많이 준비해서 오시길 바랍니다.[각주:4] 힘들게 생활하게 될 것이라 단단히 각오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부푼 꿈을 한 수 접고, 자신의 현재 모습을 냉정히 바라보고, 떠도는 풍문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좌절이 숨어있을지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준비된 분들이라면 저는 실패해버린 위의 목표들을 달성하고 멋지게 워킹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실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 영어실력 '늘리기'에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영어를 매우 많이 준비했습니다. [본문으로]
  2. 위에서는 일반적인 '호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경험한 '멜번'만을 얘기합니다. 다른 도시는 가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3. 멜번이 신분제 사회는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는 있고, 제가 방금 말한것과는 반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들'의 문화에 동참하는 워홀러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생활과 즐거움을 지인들에게 말하고 인터넷에 글로 표현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4. 본문과는 조금 다른 어조 말해보겠습니다. 솔까말 우리가 여기 영어학원에 돈 가져다 바치려고 온건 아니잖습니까? 이왕 온거 이딴 나라에 돈 퍼주기보단 왠만하면 좀 빼먹고 가자구요. [본문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는가?

자유게시판2011. 7. 18. 14:39

*2011년 7월 18일에 처음 쓰기 시작했던 글인데, 이제서야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2013년 2월 20일) *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쉽게 판별하기 힘들지만,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터놓고 말해, 상이한 직업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공인 회계사'와 '건설 노동자' 사이에는 메꾸기 힘들어보이는 큰 간격이 느껴집니다. '좋은' 직업이라는 인상과 '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인상 말입니다.

저는 사실 2년 전 호주 멜번에서 직업 청소부였습니다. 청소일을 하던 당시,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은 사실로 느껴졌습니다. 하나의 도시가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결국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직업은 동등하게 '필요'한 직업인 셈입니다. 

저는 두 군데에서 청소일을 했었습니다. 집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집에서 2km정도 떨어져있는 건물의 화장실입니다. 하루종일 요리사들이 음식를 만들면서, 손님들이 식사를 하면서 레스토랑은 여기저기 더러워집니다. 하루종일 회사원들이 볼일을 보면서 건물 화장실은 더러워집니다.어떤 장소를 누군가가 지저분하게 만들었다면, 더러워진 장소는 깨끗해져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더럽혀놓은 장소를 치우기 위해 저는 매일 일을 했습니다. '필요성' 하나만 집중해 생각해본다면, 청소부는 정말로 필요한 직업입니다.

필요성을 기준으로 직업의 귀천을 정하기는 어려운듯 합니다. 청소부는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지만, 그 외 모든 직업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학생의 일상을 생각해볼까요? 통학을 위해서 대중교통을 운전해주시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강의를 진행해주시는 교수님들도 필요하고, 각종 사무업무를 처리해주는 행정실 직원도 꼭 필요하고,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술한잔 하기위해 술집 사장님과 술집 아르바이트생도 꼭 필요합니다. 

'필요성'을 기준으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 모든 직업은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며, 결국 상이한 직업들 사이에 위계 차이는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이렇듯 '필요성'의 관점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느끼는 직업에 대한 상이한 인상들에 변수로 작용해, 그러한 인상들을 뛰어넘어 모든 직업이 동등하다는 결론을 낳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의 직업 지형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혹은 고소득자와 저소득자로 양극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직업마다 급여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차이가 심해지자 슬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실체 없는 담론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느낀 문제점은 바로 '공동체가 각 직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주는가' 입니다.

어떠한 직업이든, 일을 한 사람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급여을 받습니다. 급여를 통한 보상 자체는 자본주의 원리를 받아들인 세계 각국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보편적 현상이 특수성을 띄는 부분이 바로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급여의 수준입니다. 이는 나라마다, 도시마다, 공동체마다 달라집니다. 동일한 직업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어느 곳에서는 A만큼의 액수를, 다른 곳에서는 B만큼의 액수를 받을수 있습니다. 이는 해당 사회가 특정한 직업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줄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연봉이 얼마인가' 문제입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상이한 직업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상이한 인상의 간극, 다시말해 '좋은/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인상의 차이'에 또다른 변수로 작용합니다 '얼마나 돈을 잘 버는가'라는 변수입니다. 한 가지 더 고려할 사항이 있습니다. 급여의 차이는 절대적 차이 자체로도 유의미하지만, 해당 사회의 물가가 어느정도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월 소득 100만원으로도 기본적인 생활 유지가 가능한 물가의 사회가 있는 반면, 월 소득 200만원은 되어야 기본적인 생활 유지가 되는 물가의 사회도 있는 법입니다.

'필요성'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여기에서부터 설명됩니다. 필요성의 기준으로만 생각한다면, 인상으로서 느껴지는 '좋은/ 좋지 않은' 직업의 차이는 상쇄됩니다. 그러나 인상의 차이가 실질적 귀천의 차이로 나아가는지 여부는, 특정 사회가 특정 직업군에게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허락하는 급여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절대적 급여의 차이와 함께, 상대적 물가의 차이도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제가 겪은 호주 사회에서, 청소부나 건설 노동자는 결코 낮은 지위의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한 시간 노동의 대가는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만 7~8천원에서 시작해 높게는 5~6만원을 상회합니다. 육체적 피곤함을 담보로 하지만, 노동을 통해 받은 급여는 해당 직업인과 그의 가족들이 풍족한 삶을 유지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한 건의 예외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칠레 출신의 청소부는 자신의 직업을 'shitty job'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천한 직업이라는 자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길거리에서 보았던 청소부와 건설 노동자들의 일상은 매우 당당해보였습니다. 그들이 받는 적정선의 급여와 그것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과 후 여유로운 생활은 불현듯 느껴지는 '힘든 직업'이라는 인상을 아주 쉽게 무력화시켰습니다.

저는 지금 교환학생으로서 덴마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교환학생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덴마크어를 모른다는 언어의 한계상 저는 이곳에서 직업과 급여, 공동체가 상이한 직업들에게 어떤 보상을 지급하는지를 피부로 완연히 느끼기는 어려울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호주에서 피부로 느꼈던 그만큼, 이곳에서는 머리와 지식으로나마 알고 돌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대한민국 사회로 눈을 돌릴때가 왔습니다. '필요성'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청소부는 반드시 필요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과연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삶을 허락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게모르게 느껴지는 '좋은/ 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인상은, 안타깝게도 급여의 차이로까지 영향을 미쳐 해당 직업에 대한 인상을 고착화시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표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다같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글도 리믹스다.  (0) 2013.04.05
연필을 깎는 손  (1) 2013.03.28
다큐멘터리 3일, 아마르 꼬레아-칠레 Kpop콘서트 방송을 보고  (0) 2012.09.03
무제  (0) 2012.02.17
백 투더 퓨쳐!  (1) 2011.08.26

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13. 16:45

나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다. 대체로 정이 많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만 때때로 모질게 이기적이고, 대체로 양심을 따르며 규칙을 준수하려 하지만 때때로 정해진 것들을 거부하며 파괴적인 방향을 지향하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쨌든 이상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이상한 점이 많으면서 동시에 생각도 많은 나에게 영어는 참 성가신 존재다. 어릴때부터 좋아했기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 덕분에 한국에서만 공부한 학생 치고는 괜찮은 영어를 구사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네 영역 모두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런데 영어의 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땅에서 영어가 일상생활에 얼마나 스며들고 있는지를 발견할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우리말을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쯤 영어와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논리적인 흐름이나 어투가 조금 어색하고 조잡해 부끄러운 글이다. 짧은 글은 아니지만 여기에 붙여보겠다.

 
저 글을 쓸 당시보다 지금은 약간 입장이 유연해진 편이다. 언어의 역사를 아주 잘 알고있는것은 아니지만, 천 년 넘게 라틴어가 유럽의 사상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떤 언어가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 후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회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영어가 이렇게 절대적 힘을 유지하는것도 언젠가 끝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게 바로 조금씩 주관을 잃고 세상과 타협해가는 사고의 흐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하기도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나름 부딪치며 살아가다보니 점점 이렇게 변해가는 나를 부정할수 없다.

어쨌든 영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나조차도 호주에서 영어로 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사고방식을 엮어가는 통로에 영어가 자주 끼어들고 있다는걸 느끼고 있다.

자동차 클리너 판매 일을 하던 시절, smog라는 단어를 하루종일 말해야만 했었다. '이 제품으로 화장실 유리를 닦으시면 성에가 끼지 않습니다' 라는 내용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집에 돌아와 같이 사는 형들에게 그걸 설명하는데, smog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하는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고, 잠깐 고민하다가 내뱉은 말이 '안개'라는 단어였다. 화장실 유리에 안개라니.. 

영어가 내 사고의 흐름에 파고들고 있다는걸 처절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친구가 생일이라 생일 축하 전화를 했다. 나는 장난삼아 그 친구가 전화를 받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는 몇 마디를 영어로 쏟아부었다.

장난삼아 한 행동이긴 했는데, 대체 왜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 내가 대체 왜 그런거지?'

한국인 형들과 살면서 영어가 일상 언어로 자리잡지 않았지만, 일하는 환경에서는 어쨌든 영어를 쓰고 있는 나. 호주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영어가 귀와 입에 익숙해지는걸 느낀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영어가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영어가 나를 지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면 참 이상하다.

난 분명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영어를 섞어서 쓰는 사람을 무지 싫어했었는데..
순 우리말 개념어를 더 힘있게 보강해서 우리가 홀로 학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참을 수 없는 영어의 이끌림에 나는 오늘도 조금씩 빗장을 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버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지을 적당한 문장이 떠올랐는데, 핵심 개념어가 영단어로 표현해야 더 맛깔난 문장이 된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또 고민이다.

어쨌든 나는  2개 언어 멍청이(bi-illingual)가 아니라 2개 언어 구사자(bilingual)가 되고 싶다.


또 한번. 호주에 와서 만나는 나의 실체에 대해.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6. 3. 17:27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누구나 그렇듯 가끔씩 침울한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슬럼프라고 부르는 장기간 침체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항상 '나'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풀리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호주에 오기 전까지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대체로 모두 이루었다. 긴 글이 되겠지만 이렇게 쭉 정리해서 쓰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딴짓을 아예 안한건 아니었다. 그래도 수험기간 내내 피씨방, 플스방, 영화관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동아리 후배들과의 모임때문에 노래방에만 딱 두번 갔던걸 제외하면 딱히 뭘 하면서 놀아본 기억은 없다. 타고난 머리가 남들만큼 못해서, 그리고 조금 부족한 꼼꼼함 때문에 원하던 고려대학교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성균관대에 입학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난 우리학교를 사랑한다.

수능 이후 주어진 자유시간. 누구나 그렇겠지만 핑크빛 캠퍼스 생활을 꿈꾸었던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싶을 정도로 독하게 했다. 매 끼니를 아주 적은 양의 밥과 두부, 야채로만 채웠고 열심히 운동을 했다. 두달이 지나자 16kg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다이어트도 성공.

대학 신입생의 첫 여름방학,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처음 선보였던 내일로 티켓을 이용해 일주일간 우리나라 여행을 했다. 8월 24일까지 마지막 과외수업을 하고 26일엔 그 해 카투사 지원을 위한 토익을 보고 27일 집을 떠났다. 글을 쓰다보니 새벽 5시 50분쯤 집에서 출발할 당시가 떠오른다.. 아무튼 광명시에서 출발해 땅끝마을 해남부터 임진각까지 내 나름의 전국여행을 했다.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감으로 충만했을 그때 토익점수가 나왔다. 가채점 결과와 거의 같았다. 875점. 처음 본 시험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와준 결과에 기분이 정말 좋았다.

1학년 2학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계열 입학생이었던 나는 좋은 전공 진입을 위해 좋은 학점이 필요했지만 1학기 성적이 영 별로였다. 약간의 꼼수를 부렸고, 전공 진입시 계산되지 않는 과목은 포기한채 필요한 과목만 공부를 했다. 이번에도 성공. 영어영문학과에 진입할수 있었다.
2학년. 전공을 배정받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능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특수한 환경 덕분에(때문에?) 과 학생회 대표일을 맡았다. 그릇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능력, 동시에 쓸데없이 컸던 꿈 때문에 1년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항상 내가 좋아서 했던 일이고, 좋은 친구들
과 선배들을 만날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날 괴롭히던 어깨탈골.. 결국 재검을 통해 4급판정을 받았다. 2009년 겨울 장애학생보조 공익근무를 시작했다. 2년간 우리 아이들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장애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하면 우리 아이들 생각에 아직도 눈물을 흘릴때가 있다. 근무기간동안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24개월동안 200권에 조금 못 미치는 책을 읽었다. 함량미달인 책도 많았고, 채 100쪽도 되지 않는 지식총서류도 다수 끼어있지만, 그전까지 1년에 단행본 한 두권 읽을까 말까 하던 나이기에 대단한 성과였다. 영어공부도 놓지 않았다. 삶이 쳐진다고 느껴지던 시절 토익에 응시했다. 무료하고 축 쳐지는 일상을 탈출하고자 응시한 시험. 950점.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역이 난 하면 된다니까'.

어느순간부터 소집해제 후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에 이어 결정한 호주 워킹홀리데이. 현지에서 일을 구할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응시한 아이엘츠 제네럴. 결과는 밴드 스코어 7.0이었다. 

고등하교 3학년때부터 한국 나이 23살이 될때까지 난 저렇게 살아왔다. 뭐든지 정말 마음먹고 도전한 일엔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 다만 한가지 계속해서 실패했던건, 대학교 2학년 이후에 시도했던 다이어트들... 그러나 운동은 나랑 안맞는가보다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인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자신을 '고급인력'이며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주에 도착한지 두달 반이 지났다. 여기 와서 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있다.

나는 사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딱히 할줄 아는 요리도 없었다. 공익근무기간동안 우리 아이들과 매주 요리교실에 참여하긴 했었지만, 요리 과정을 제대로 눈여겨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집을 나와 살려면 먹을것도 알아서 해야하는 법인데, 요리를 못하니.. 매일 먹는게 거기서 거기다.

돈을 번다는 행위, 즉 노동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몰랐다. 한국에 있을때 과외만으로 돈을 벌어봤기에 몸을 움직여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내는게 이렇게 힘든 것인줄 몰랐다.

내세울게 없어졌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특수한 '학벌'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쨌든 존재하고 있는 대학 서열에서 1등은 아닐지언정 어딜 가도 뒤지지 않을 간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렇게도 싫어하던 학벌이 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내가 나를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큰 요인이었다. 학교 이름을 빼자 난 여기서 내세울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졌다. 그렇다고 일을 잘하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펜을 굴리고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이었다. 몸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해본적이 없는데 잘할리가.... 군대 안갔다와서 그런거라고 누군가가 말할 것 같다. 맞다. 군대 안갔다온 놈이라서 그렇다.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시간.. 일하는 식당이 있긴 하지만 매일매일 눈치만 본다. 미운오리새끼가 된 기분이다. 


식당에서 매일 인도 직원들에게 무시당하면서, 반사적으로 '나도 한국가면 고급인력이다 씨발'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외치고 돌아서면 씁쓸하다. 아 난 정말이지 제대로 할줄 아는게 없구나.....

오늘도 약자의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에선 나자신을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5. 28. 23:07
정직 성실 끈기있음

등등으로 자평해왔지만

여기 와보니 아니었다.

밤샘청소하던날 뼈저리게 느꼈다.

난 일도 못하고, 또 몸이 힘드니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지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처리하질 못했다.



규칙을 엄수한다고 생각했지만
교통비 몇달러가 아깝고 무료트램 기다리는 시간이 귀찮아 70번을 그냥 탔다가
인스펙터를 만났다..



 

경쟁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는 모르지만, 내 속에 확실히 내면화되어있다.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5. 28. 23:05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 혹은 워홀러로 지내면서, 한국에 있을때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지금 쓰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경쟁심'


여기 오기 직전 읽다 만 책이 있는데, 강수돌 교수가 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라는 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읽다 만' 책이 아니라 몇 쪽 들춰보고 만 책이라고 해야겠다. 제대로 다 읽고 왔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일화가 있다.




구직일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4월 초에 딱 6일간 세일즈 일을 했었다. 실제 현장에 나가 판매일을 하기 전날, 회사 사무실에서 나를 비롯한 새로운 사원 네명이 교육을 받았다. 세일즈의 기본 자세, 우리가 판매하는 상품의 특징, 판매 전략 등등 상상 가능한 범위 내의 교육이었다. 매니저의 직접 설명, 영상자료 시청, 관련 서류 숙지 등으로 이어지는 교육이었는데, 매니저가 회사와 직원의 관계에 대한 조항을 읽어보라고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10분정도면 다 읽을만한 내용이니 그 사이 자신은 다른 일을 처리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계약 관련 조항을 읽어나가던 가운데 내가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당시 회의실에는 나, 뉴질랜드 출신 Ethan, 일본인 Mori,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호주인 이렇게 네 명이 있었다.

문서를 읽는 틈틈이 Ethan과 그 호주인이 얼마나 빨리 읽어가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뒤쳐지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물론 일본인 Mori보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앞서가고 있는지도 계속 생각했고......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외국어 영역 독해 문제를 풀면서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풀고 있는지를 틈틈이 확인하던 그 버릇, 그 경쟁심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글을 쓰다보니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왼쪽 대각선 앞에 앉아있던 우리반 1등, 아니 전교 1등이 몇 쪽의 몇 번 문제를 풀고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친구 등 너머로 슬쩍 넘어봤던 그 시험지의 모습, 그리고 그 친구의 뒷모습..


영어가 제2언어인 내가 호주, 뉴질랜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영어 문서를 느리게 읽는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경쟁이 어떻게 개개인에게 내면화되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점은 내 속엔 이미 경쟁심이 내면화되어있다는 것이다. 경쟁, 제로섬을 지양하며 협력, 공존을 지향하고 있던 내 관점은 아직 머리속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이런 모습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매일매일 심심하고, 가끔 심란하고, 성공에서 멀어지며 실패로 수렴해가고 있는 워홀 생활을 생각하면 또 가끔 슬프지만..

좀 더 고상하게 생각하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직까지는 지배적이다.

적어도 이렇게 나에게 계속 글감을 주고 있지 않은가?
 

호주에서도 책을 읽기 시작하다.

2011/워킹 홀리데이 자유2011. 5. 23. 17:58

한국에서 지내던 때, 책을 많이 읽고 싶었고 또 실제로 주변의 대다수 친구들보다는 많이 읽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느꼈고, 책을 통해 상상력을 키웠다.
그렇지만 뭐든지 과하면 모자르니만 못한 법. 몸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책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호주 생활을 시작으로 대략 1년간의 외국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책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눈으로 피부로 손끝으로 세상을 겪고 싶어 해외로 나왔기에 적어도 이 기간동안은 책과 만나지 않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육관 청소를 하던 와중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원래 내 모습대로라면 머리속 생각이 몸으로 내려오기까지 며칠이 걸려야 하지만.. 저 생각을 품고는 바로 다음날 멜번 시립 도서관을 찾았다. 그것도 바닷가에 놀러갔다와서 피곤한 상태로!

영문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아는 '재미있는' 작품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검색해본 몇몇 작품들은 이미 대출중이었다.

'할 수 없지' 라는 생각 절반과 '역시 한글 소설이 아직 나에겐 활력소지'라는 생각 절반으로 한글 소설 책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둘러보니 시립도서관에서 2009년을 전후로 한번에 책을 들여온 후 새로운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보였다. 몇몇 작품을 꺼냈다 집어넣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온 작품, 『노서아 가비』. 책을 다루는 방송에서 소개된적이 있었고, 한국에 있을때 그 방송을 본 후 항상 제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소설이다. 다만 한국에 있을 때는 다른 책들에 더 끌리는 바람에 읽지 못했는데, 2년 전부터 이름과 소재를 기억하고 있던 책을 만나니 바로 손이 갔다.







'러시아 커피'의 한자 표기를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은 말, '노서아 가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읽어보기를 추천하며, 그냥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19세기 말에도 이미 커피를 즐기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에 놀라며 이야기에 빠져들 것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을 둘러싼 어지러운 정세를 떠올리며 그때 그 시절 러시아 공사관의 공기를 맛볼 수 있을테며,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김탁환이라는 작가가 만들어낸 입체적인 인물들에, 특히 '여자' 주인공 따냐의 대사 하나하나에 빠져들고 속도감 있는 전개에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여자라는 사실에 왜 강조를 했는지는 끝까지 읽어본 후 작품해설을 읽어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에 따로 적을 필요는 없는것 같다. 그리고 사실 정말 오랜만에 책 서평을 쓰는지라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까지 쓰려니 막막하기도 하다.

몇 달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